독일의 스포츠용품 제조기업 아디다스가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국립 공원 자페이온 홀에서 드론 쇼를 했다. 화려한 드론 쇼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런데 공중에 떠 있는 드론들은 촬영 각도와 원근법으로 인해 마치 아크로폴리스 바로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드론이 아디다스의 삼선 운동화 형상을 만들자, 이 모습이 마치 운동화가 아크로폴리스를 밟고 걷어차는 듯한 모습이 됐다. 아디다스가 그리스 문화유산을 모욕했다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아시다시피 아크로폴리스는 파르테논 신전, 디오니소스 극장 등 고대 그리스 유적이 모여있는 그리스 관광의 상징이다. 특히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다. 유네스코의 로고가 바로 파르테논 신전의 형상이다. 그래서 운동화가 신전을 밟는 모습이 그리스 문화유산의 핵심을 모욕적으로 상업화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아크로 + 폴리스'는 말 그대로 '높은 + 도시'로 높이 156m의 바위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아테네 어디에서나 고개만 들면 보인다. 아디다스 측에 따르면 자페이온 홀 인근 상공 공연을 위해 허가를 받고 비용도 지불했으며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문화 유적지를 광고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페이온 홀에서 하늘로 띄운 드론이 아테네 시내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크로폴리스 상공에 있는 걸로 보였을 뿐 문화유산 모욕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보통 문화유산 모독은 유적지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거나 과도한 노출을 하는 예술 작품을 촬영한 경우가 많이 거론된다.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이나 이집트 카이로 기자 피라미드 등과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지를 배경으로 외국에서 온 이들이 종종 누드 사진을 촬영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해당 국가에서 신성한 유적을 모욕했다는 비판 여론이 나오는 식이다.
그런데 이번 아디다스의 아크로폴리스 모욕 사건은 성격이 좀 다르다. 이 일을 두고 그리스 정치판에서 야당이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유독 크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촬영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정부가 문화유산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렸다는 식으로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그리스의 유명 감독이 아크로폴리스에서 촬영을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았기에 마치 자국 예술가는 불허하고 아디다스는 허락했다는 뉘앙스로 비난한다.
어쩌면 하필 독일의 아디다스가 아크로폴리스를 밟는 형상이었기 때문일까?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인 이탈리아 왕국과 나치 독일은 차례로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리스 왕국은 처음 이탈리아 왕국의 침공은 막아냈지만, 나치 독일군이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 입성하던 그날 운명을 다했었다. 그리스에는 나치의 괴뢰국이 들어서고 영토는 침략국들에 의해 찢어진 아픈 기억이 있다.
과한 추측일지도 모르나 어쩌면 나치당 당원이었던 다슬러 형제가 만든 아디다스가 아크로폴리스를 위에 떠 있는 모습이 그리스인들은유독 더 싫었을 것이다. 과거가 발목을 잡으니 독일이, 아디다스가 짓밟는다는 느낌을 만들 만큼 싫었다는 거 아닐까.
헤럴드 김 종백
런던 코리아타운의 마지막 신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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