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목사가 텃밭에서 농사를 지은 것이라며 상추를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왔다. 들여다보니 대가 억세지도 않고 가장 맛이 있을 때에 따낸 것들이라 크기가 모두 손바닥만했다.
먹음직한 상추를 보니 어머니의 18번 쌈장이 생각났다. 된장에 맛살(맛조개)을 넣고 달박달박 뚝배기에 끓이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몸이 아플 때면 뜬금없이 그 쌈장이 생각 나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그냥 먹기 아까운 상추였다. 아무 반찬도 없이 제대로 된 쌈장 하나만 식탁 한 가운데 올려놓고, 식구들이 둘러 앉아 먹어야 제 맛이 날 명품상추였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아내가 퇴근하기 전에 한 번 쌈장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5년 전쯤인가... 어머니가 영국에 계실 때, 쌈장 만드시는 것을 어깨너머로 본 적이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그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영국에서 구하기 힘든 맛살은 잊고 산지 오래라 홍합과 새우를 대신 넣으면 그만이었다. 어머니도 그 때 ‘맛살도 없는 나라...’ 타령을 하시며 그렇게 만드셨던 기억이 난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크기의 뚝배기를 하나 꺼냈다. 뭐 그렇다고 설렁탕집처럼 뚝배기를 쌓아놓고 사는 것은 아니다. 크기가 다른 것으로 딱 세 개를 가지고 있지만 아내나 나나 뚝배기를 좋아해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사용하게 된다.
냉동 해물들을 꺼내 이것 저것 조금씩 섞어 물에 담갔다. 그리고 해동을 하는 동안 큼직한 양파 하나를 벗겨 잘게 다졌다. 휘발성이 강한 프로페닐... 어쩌고 하는 성분 때문에 눈이 쓰렸다. 해동이 된 해물들을 손가락 한마디 크기로 썰어 양파와 함께 뚝배기에 담았다. 홍합, 새우, 오징어, 조개...
맛살이 없는 마당에 그냥 입맛에 따라 아무거나 넣어도 상관이 없다. 쌈장이라는 것이 원래 격식을 따질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준비가 끝났는데 물과 된장을 어떤 비율로 넣어야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혹시라도 비율을 잘 못 맞추면 짜디짠 해물 된장찌개가 되는 수가 있다. 너무 된 것은 물을 더 넣으면 그만이지만 물이 너무 많아 묽어지면 되돌리기 힘든 낭패가 된다.
우선 된장을 큰 숟가락으로 5개를 떠 넣고 물을 조금 넣어 봤다. 요리를 할 때 ‘조금’이라는 말과 ‘약간’이라는 말처럼 애매한 것도 없다.
난 아무래도 목사가 되기보다는 요리사가 되는 편이 나을 뻔했다. 익숙하게 여러 번 해 본 음식처럼 단 번에 농도가 맞아 떨어진다. 스스로 감격하는 사이에 그 두꺼운 뚝배기가 벌써 달박달박 끓기 시작했다. 티 스푼으로 하나 가득 설탕을 넣고 좀 더 끓인 후에 뚜껑을 열고 맛을 보았더니 맛이 그만이었다.
“음... 이 맛이야”
쌀을 씻어 압력밥솥에 앉히고 ‘취사버튼’을 눌렀다. 이제 상추만 씻어놓으면 아내를 위한 완벽한 저녁식사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아내가 퇴근을 했다.
“여보~ 된장찌개 태웠어요?”
문을 열자마자 너무 진한 된장냄새가 진동을 하니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문 앞에 가방을 내려 놓고 부엌으로 달려간다.
“아니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쌈장이지”
맛이 궁금했는지 아직도 열기가 남아있는 쌈장을 손가락 끝으로 찍어 맛을 본다. 눈가에 웃음이 번진다.
“우와~ 너무 맛있다”
다른 반찬은 필요가 없었다.
쌈장 뚝배기를 식탁 한 가운데 놓고 윤기가 흐르는 흰밥을 펐다. 그리고 쌈장 옆에 씻어놓은 상추를 한 바구니 올려 놓았더니 정말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환상의 식탁이 되는 것이었다. 출장을 다녀와서 시차 때문에 입맛이 없다며 라면을 끓여먹던 아내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이미 표정은 행복에 겨운 밝은 얼굴이었다.
아들녀석은 에피타이저로 ‘크리스피 덕’을 전병에 싸먹는 것 같다며 재미있어 했다.
“아빠... 그런데 이거 정말 맛있어”
종자는 속일 수가 없었다. 누가 한국사람 아니랄까 봐...
쌈장을 먹다 보니 어머니의 18번과 다른 것이 있었다. 풋고추를 썰어 넣는 것을 잊은 것이다. 아내는 풋고추가 빠졌어도 충분히 맛이 있다며 먹다 남은 쌈장을 그 다음날 아침까지 먹고 출근을 했다.
갑자기 성경구절 하나가 생각났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고후 4:8)” 우겨쌈밥... 쌈밥집 이름으로 썩 괜찮다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쌈을 싸는 것처럼 사방으로 꾹꾹 눌러 우겨쌈을 당하여도 예수를 믿으면 위로가 되고 살아날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다 (고후 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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