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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술 이야기

hherald 2010.12.07 00:55 조회 수 : 11176

 

나는 주류(酒流) 목사다. 흔히 큰 교단 목사들이 자부심으로 말하는 주류(主流)가 아니라 가끔씩 와인도 마시고 맥주도 마신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술을 퍼 마시는 주당은 결코 아니다. 겨우 반 파인트만 마셔도 술독에 빠진 꼴이 되는 까닭에 더 마시고 싶어도 맥주 반 파인트 이상을 마시지 못한다. 와인은 한 잔 가득 마시기도 버겁다.

91년 2월, 홍콩을 경유하는 영국 행 비행기를 타고 어설픈 유학 길에 올랐다.
"오빠... 밥 꼬박꼬박 챙겨먹고... 알지...? 그리고 편지 자주 쓰고..."
결혼 하기 전이었던 아내가 갑자기 말 끝을 흐리더니 꾹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16살짜리 아들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당장 엄마를 부르며 달려간다. 갑자기 아빠가 존경스럽다는 얼굴이다. 나이든 엄마 아빠에게 그런 로맨틱한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무섭게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신사는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잔 하지 그래?”
“감사하지만 사실 제가 교회 전도사거든요”
“아~ 그러냐”며 웃던 그 분은 더 이상 내게 와인을 권하지 않았다.

홍콩의 야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비행기가 중간 경유지인 홍콩의 야경 사이로 다시 솟아 올랐을 때 중년신사는 스튜어디스를 불러 와인을 주문했다. 그러자 두 자리 건너편에 앉아서 성경을 읽으시던 할머니 한 분이 일어서서 다가오시더니 중년신사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목사님... 와인을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예요?"
"권사님~ 걱정 마세요. 그래야 스무 시간을 넘게 가는 이 불편한 이코노미 클라스에서 눈이라도 좀 붙이지요. 허허허~"

세상에 목사가 술을 마시다니...
외국에 나가면 가끔 정신 나간 목사들이 내놓고 술을 마신다더니 출국한지 몇 시간 만에 그 꼴을 내 눈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 정신 나간 목사가 바로 교계에서 많은 분들에게 존경 받는 OOO목사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제가 전도사거든요’라고 말하던 내 엄숙한 표정이 그 분에게 얼마나 우스운 코미디가 되었을까 싶다.

두 주전에 킹스톤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명치 위쪽 가슴 한복판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대로 죽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느낌은 정말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몇 시간 동안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난 결과가 너무 황당했다.
평소에 커피와 잉글리시 티를 너무 많이 마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랬다. 책상에 앉아 있다 보면 하루에 열 잔 이상을 마시게 될 때도 있다. 커피와 티가 산성이기 때문에 몸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가끔씩 마시는 녹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을 많이 마시고 과일과 주스를 자제하고 우유와 요거트를 많이 먹고 와인을 한 잔씩 마시라는 것이 의사의 처방이었다. 커피와 티는 마시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되 어쩔 수 없다면 하루에 두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의사가 마시라는 와인은 그 동안 단 한잔도 마시지 않았다. 세어보니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오늘 무심코 마신 커피와 티가 벌써 다섯 잔이 넘는다. 그러나 아무도 커피와 티 때문에 내 신앙을 정죄하는 사람은 없다.

몇 년 전에 썼던 비슷한 칼럼 때문에 나는 런던의 주당 목사로 낙인이 찍혔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주량을 알면 그런 소리를 못할 거라며 웃어 넘긴다.

사실 나는 교우들이 모여서 맥주를 마신다거나 와인을 마시는 것을 정죄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교우들이 모여 식사를 하면서 와인 한 두 잔을 마시고 실수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혹시 실수를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와인 한 잔의 문제가 목숨을 걸고 싸우며 논쟁(論爭)을 벌여야 하는 신앙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회를 하다 보면 술 한 잔을 마시고 취해서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사람보다, 맨 정신을 가지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게 된다. 목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한마디로 영국에 살고 있으면서 술로 마시는 와인과 식사 음료로 마시는 와인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한심하다는 이야기다. 정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뒷전에 두고 술 이야기만 나오면 열을 올리니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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