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은 청어를 팔고 있는데 혼자만 살아있는 청어를 파는 어부가 있었다. 어부는 청어를 산 채로 런던까지 운반하는 비법을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슬며시 그 비법을 물었더니 익살스런 표정으로 그 비법을 말해주었다.
"비법이랄 것도 없어. 난 그냥 나무어항에 청어를 잡아먹는 천적天敵 한 마리를 집어 넣을 뿐이야. 그러면 처음에 몇 마리는 잡아 먹히지만 나머지 수백 마리는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정신 없이 도망을 다니게 되거든... 한 마디로 죽을 새가 없는 거야. 그러다 보면 산 채로 런던에 도착하게 되는 거지”
어디를 가나 눈의 가시는 있게 마련이다. 중학교를 다닐 때도 있었고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라고 눈에 가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그런 것들이 눈 앞에서 사라질 줄 알았는데 직장을 잡고 보니, 그 곳에는 눈을 시뻘겋게 뜨고 나를 밟고 일어서려는 더 끔찍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평생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석삼자로 깊게 패인 주름살 때문에 학생들은 아버지를 ‘백두산 호랑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아버지의 성품에서 독毒한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조용한 성품에 좀 기분이 좋아지시면 어깨너머로 배우신 아코디언이나 피아노를 치시면 흥겹게 노래를 부르시던 분이셨다. 그렇지만 사람에게 마음이 부대껴 울적하실 때는 아무 말씀도 없이 밤늦도록 마루에 앉아 그림을 그리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단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자주 어려운 아이들의 학비를 내 주셨는데, 그 때마다 의로운 고난을 당하시던 그리스도처럼 어머니에게 고난에 가까운 바가지를 긁히셨다. 그런 날은 어머니의 화가 다 풀릴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으시고 아무 말씀도 없이 어머니 옆에 앉아계셨다.
평소에 아버지는 "그 놈 때문에 도무지 직장을 다닐 맛이 안 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지금도 '그 놈'의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그 놈이 아버지를 괴롭혔던 아버지의 천적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다. 아버지는 '그 놈' 때문에 자주 그림을 그리시면서 상처 받은 자존심을 스스로 회복하시고, 때로는 거친 붓의 터치로 솟구치는 분노를 삭히셨다. 그렇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실 땐 마른 멸치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년퇴직을 앞 두고 계시던 그 무렵에 젊은 나이로 교장이 되었던 재단이사장의 조카가 바로 '그 놈'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는 그런 천적이 도사리고 있는 학교 교무실을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야 하는 부대끼는 인생을 사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 아버지만의 독특하고 유별난 삶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땅에 발 붙이고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상日常이리라!
정년퇴직을 하신 후부터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천적에게 부대끼던 학교 교무실 대신 매일 좋아하는 분들과 여유롭게 낚시를 즐기시는데 특별히 건강이 나빠질 이유가 없었다. 결국 천적에게 부대끼는 하루하루가 아버지의 ‘삶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신지 삼 년 만에 기어이 세상을 등지셨다.
나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면 천적이 피해가는 폼 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월을 경험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더 많은 천적天敵을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천적에게 부대끼며 마음고생을 하다 보면 슬그머니 없던 오기도 생기고, 그러다가 이리저리 몰려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되면 그 때서야 등 뒤에 서서 나와 함께 천적을 마주보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삶은 ‘천적 없는 죽음의 나무어항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하루 종일 부대끼는 우리 현실이 ‘천적을 집어넣은 지혜로운 어부의 나무어항’쯤 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부대끼는 것처럼 또 누군가는 나를 바라보며 부대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분명한 것 하나는 ‘천적(天敵)이 있어야 내가 산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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