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년 함께 산 저 여자 이혼하고 싶다 만나기만 하면 가슴 열어보고 싶던 그녀
언제부터인지 누르팅팅 추레하게 보이는 여자 찬바람 서릿발로 돌던 그 냉정함
어디로 가고 맘 내키는 대로 얼었다 녹았다 변덕만 늘어가는 여자 그 큰 덩치
좁은 주방 차지하고 앉아 목소리만 커지는 건망증 까지 심한 여자 배추김치 총각김치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던 식탐 툭하면 신트름 게워내는 여자 위하수증 만성위염
골다공증 요심금 들여다보면 어느 한 곳 멀쩡한 곳 없는 저 여자 살다보면
고운 정 미운 정 사랑 없어도 산다고 쌓인 정은커녕 정나미 떨어져 가는 여자 이십년
함께 살았으면 많이 참았지
요즘 내 심사 눈치 챘는지 날마다 질질 우는 오래된 냉장고 저 여자
김영희의 시詩를 읽고 있다.
때론 성경을 읽는 것보다 김영희의 시 한 줄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가수 강산에의 노래가 소절소절 공감이 되어, 복음성가보다 더 좋다고 느껴지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정체성의 혼란과 함께 자꾸 잉여인간을 떠올리게 되는 나의 실존을 김영희의 시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냥 웃으며 재미있는 시詩라고 생각했던 <오래된 냉장고 저 여자>. 그 시를 다시 읽어보게 되는 이유는 혹시 오래된 냉장고 그 여자, 김영희와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까닭이었다.
우리집 오래된 냉장고는 내 아내가 아니다. 집구석에 처박혀 알아주지도 않는 글이나 쓰면서 끼니 때마다 생각 없이 꾸역꾸역 먹어대는 내 신세가 바로 오래된 냉장고를 닮았다. 이젠 김영희의 시를, 그냥 웃으며 재미있게 읽을 수가 없다. 곱씹어 읽어볼수록 어쩌지 못할 내 신세와 잉여인간이 되어가는 나의 실존이 마음에 각인되기 때문이다.
‘오빠는 석고상을 닮았다’느니 ‘오빠는 살아있는 지성知性’이라느니... 철없던 그 시절 아내의 이야기는 이미 잊고 산지 오래다. 그렇지만 아내 앞에서 내 인생이 이렇게 궁상맞은 애물단지 신세로 전락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그것이 나의 자격지심이라는 사실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더 견디기 어렵다.
여자든 남자든 그 성별을 막론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왜 유독 오래된 냉장고를 닮아가게 되는 것일까? 큰 누이뻘 되는 김영희 시인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궁상맞은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 머지않아 정나미 떨어져가는 우리집 냉장고는 퇴출되고 말 것이다. 어쩌면 그 때쯤, 냉장고와 함께 버리고 싶은 목록 0순위에 내가 오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자산목록으로서의 내 가치 상승이 아니라, 절제되고 정리된 내 삶의 모습이다. 혹시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해 잉여목사가 되더라도, 스스로 쓸만한 남편이 되고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 아내의 이야기다. 그 것을 푸념으로 듣고 듣기 싫은 바가지로 들었더니 어느새 내 신세가 잉여인간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김영희의 시詩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실존은 오래된 냉장고와 닮아갈 수 있지만, 그 실존은 결코 냉장고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얼마든지 퇴출목록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궁상맞은 내 삶을 바꿔보기로 했다. 아내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오래 전의 나를 떠올려본다. 그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지만 나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언제부턴가 망가지기 시작했던 삶의 습관들과 뒤틀린 생각들을 기억 속에서 하나씩 더듬어 본다. 그러다가 ‘좁은 공간 차지하고 앉아 목소리만 커지는 내 건망증’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울 앞에 선다. 나이든 내 얼굴보다 더 몰골이 사나운 것은 마치 큰 옷을 입은 것처럼 여기저기 볼품없이 늘어진 내 몸뚱이다.
작정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뛰는 것보다는 몸에 무리가 적은 수영을 하면서 다이어트를 병행하기로 했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식초 마시기’도 잉여인간이 되지 않으려는 나의 마지막 발악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게 발악을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이 재미있다. 그렇게 살아만 준다면 퇴출을 재고해보겠다는 듯한 의미심장한 표정이다.
아들놈도 한마디를 한다.
“아빠... 요새 왜 그래?”
‘
나? 저 냉장고와 함께 버려지고 싶지 않아서...’ 그냥 마음속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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