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나는 런던-99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육체적 죽음의 불가능성/ 데미언 허스트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Damien Hurst
미워할 수 없는 괴물
오늘의 런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미술은 아주 중요하다. 다양한 현대미술의 위력을 실감하지 않고서는 런던을 이해하기 힘들다. 뱅크시를 필두로 하는 도전적인 거리의 미술가들이 살고 있고, 정치가들이 무서워해야 할 많은 호가스의 후예들이 시퍼렇게 눈뜨고 있고, 흑인문화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흑인화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어느덧 런던을 지배하는 문화의 첨단은 미술이 된 느낌이다. 런던의 다양한 미술들은 광범위하게 런던을 지배하고 있다.
문화에 있어서 영국이 ‘작은 거인’임을 입증한 것은 60년대 중반 영국의 젊은 대중 음악가들이 이루어낸 ‘브리티시 인베이션(British Invasion)’에서 비롯된다. 비틀스를 중심으로 한 애송이 영국 젊은이들이 이루어낸 그 문화혁명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미국의 대중음악 팝(Pop)에 얼마나 큰 영국의 지분이 들어 있는가를 세계인들에게 보여준 사건이다. 이후 영국은 헤비메탈, 프록, 펑크 등을 발전시키며 세계 대중음악의 새로운 본가로 등재된다. 그리고 이십 여 년이 흐른 후 이번에는 미술 쪽에서 거침없는 폭풍을 일으킨다.
그 폭풍은 1988년 아직 학생이었던 애송이 미술가들의 ‘프리즈’라는 전시회에서 시작된다. 데미언 허스트(1965~ )를 중심으로 한 그 젊은 미술가들을 ‘영국의 젊은 예술가들(Young British Artists)’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현대 미술의 방향성과 정체성에 대해 어설프고 투박한 미술들을 통해 세계를 향해 질문하였다. 안타깝게도 지구상의 그 누구도 그들의 어설프고 투박한 미술에 대해 설득력 있게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현대미술은 이제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혼돈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데미언 허스트는 이후 현대미술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하였다. 그의 작품은 생존하는 대가들을 훌쩍 뛰어넘는 고가의 상품이 되었으며, 그의 괴상한 표현법들은 인류의 금기를 건드리는 파격적 미술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철학자처럼, 종교 지도자처럼, 특급연예인처럼 런던을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미술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그의 출세작 ‘살아있는 자의…(1991)’는 허스트 미술의 허상과 실상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다.
비틀스에게 브라이언 앱스틴이 있었다면 허스트에게는 찰스 사치가 있었다. 세계적인 미술 수집가 사치는 이름없는 젊은 화가들을 후원하여 오늘날의 이런 미술판을 허락한 절대적인 원인 제공자이자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 작품은 사치가 지원한 제작비 5만 파운드로 제작되었다. 제작비는 호주의 어느 어부가 잡은 상어와, 죽은 상어를 영원히 헤엄치도록 하는 포름 알데히드 희석수와, 거대한 수족관에 들어갔다. 결국 사치의 음흉한 기대대로 이 작품은 2004년 한 미국의 펀드 매니저에게 최소한 8백만 파운드로 추정되는 거액에 팔렸다.
허스트는 자신의 미술을 ‘특이한 방법의 이야기’라고 변명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명상’ 쯤이다. 인간이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모습을 잔인하게 보여주며 허스트는, 더 이상의 비평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어조의 현기증 나는 긴 제목을 붙였다. 허스트의 미술은 언제나 잔인하다. 그러나 그 잔인함은 불행하게도 허스트만의 책임만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인류 역사의 잔인함이 친절하게 허스트를 가르친 결과이므로, 그는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영악할 정도로 자유롭다. 해골에 다이몬드를 박은 그 잔인하고 역겨운 작품에 대해서도 그는 자유로울 것이다. 세상이 물질만능의 시장으로 전락한 것은 분명 허스트 책임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커다랗고 흉폭한 죽은 상어를 수족관 속에 담아 두는 일은 거창하게 해석한다면, 예술이 할 수 있는 한계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어는 예술가가 허용한 영원한 삶 속에 갇혀 버렸다. 인간에게 보여지는 생명의 모습을 유지하는 한 그 상어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알 수 없는 본질에 대한 명상에 번뇌하던 인류 고금의 모든 철학자들의 숙제를 일거에, 앙증맞게 풀어버린 작품이다. 물론 거창하게 해석한다면 말이다.
허스트는 고도의 대중성과 고도의 작품성을 함께 보여주는 놀라운 순발력을 지닌 미술꾼이다. 나는 부디 그를 미술꾼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를 연예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가가 연예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속 좁은 의미는 아니다. 단지 연예인들을 무시할 권리는 대중인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새로운 귀족계급이 된 연예인들은 일반인이라면 평생 노력해도 얻기 힘든 엄청난 부와 명예를 대중을 통숨에 얻는 대신, 나처럼 삐딱한 대중에게는 무차별로 무시당할 숙명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미워할 수 없는 괴물들이다. 이 무시무시한 바닷속 괴물을 살려 놓은 허스트의 출세작이 결코 미워할 수 없고 결코 사랑할 수도 없는, 거대한 괴물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