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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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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76
깨어나는 양심/ 홀만 헌트
The Awakening Conscience/ William Holman Hunt

 

미친 양심 

그림이란 화가가 세상에 던지는 몇 마디 언어다. 순수하게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사회적이다. 사회를 떠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처럼 그림도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려진 순간부터 그림은 이미 사회를 향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사회성이나 도덕성이라는 머리 아픈 화두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림이 갖는 사회를 향한 표정을 읽는 것은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에 해당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평론가 러스킨은 예술과 사회의 상호관계를 예술의 본질로 파악한 바 있다. 러스킨과 유사한 예술론으로 그림을 그렸던 영국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는 ‘중세의 미(美)’를 오염되어가는 현대를 구원할 새로운 예술의 메시아로 보았던 화가들이다. 프랑스 인상파 직전에 활동하던 그들이 인상파 대신 미술사의 대세를 장악하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추상과 관념 대신 보다 실용적인 사회적 미술이 유행하였을 것이다. 사회를 비판하는 예술의 특권은 사회의 깊숙한 곳에서 날개를 꺾인 채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자각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고마운 것이다. 


라파엘전파의 중요화가였던 윌리엄 홀만 헌트(1827~1910)의 유명한 그림 ‘깨어나는 양심(1853, 테이트브리튼)’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성찰의 단면이다. 계몽시대의 그것처럼 무지몽매한 사회를 일깨우려는 화가의 의도가 숨겨진 흥미로운 그림이다. 테이트브리튼에 걸려진 이 그림은 자세히 공부하고 보지 않는다면 다른 라파엘전파의 그림에 파묻혀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다. 다정한 부부의 나른한 봄날 오후를 그린 평범한 그림으로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사회를 향한 홀만 헌트의 진지한 성찰로 가득 찬 그림의 전신을 꼼꼼히 읽고 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빅토리아 시대를 향한 홀만 헌트의 성찰이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필요할 것이라는 강박에 휩싸이게 된다.


어느 봄날 어느 중산층 집안의 거실 풍경이다. 남자의 품에서 어색하게 일어나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이 여인은 아마도 이 집 여주인일 것이다. 그녀는 유부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화가는 그렇게 짐작하게끔 여자의 손가락들 중 결혼 반지 끼는 손가락에만 반지를 그리지 않고 있다. 남자는 방문자가 틀림없다. 테이블 위에 급하게 벗어 놓은 그의 모자가 그렇게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이 긴박한 밀회를 즐기고 있는 순간이다. 배경의 거울을 통해 우리는 여자가 창 밖의 무엇인가를 보고 남자의 품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깨어나는 양심’이라는 거창한 그림의 제목은 이러한 정황의 심증을 굳히게 해 준다. 그녀가 창 밖으로 귀가하는 남편의 모습을 본 것인지, 아니면 따스하게 빛나는 봄 햇살에 놀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 행동의 잘못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자각을 돕기 위하여 그림의 구석 구석을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림은 어수선하고 난삽한 빅토리아 시대의 인테리어 속에 있다. 혼란스러운 나무결이 보이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사건은 벌어지고 있다. 피아노 위의 시계는 유리병 속에 들어 있다. 당시의 유행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은밀한 시간을 제시하기 위한 화가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벽에 걸려진 그림은 이들의 불륜의 대가를 암시하고 있는 듯 한데, 재미있는 것은 라파엘전파를 비난하였던 로열아카데미파인 선배화가(Frank Stone)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어지러운 카펫 위에는 계관시인 테니슨의 시가(詩歌) ‘눈물, 부질없는 눈물’이 떨어져 있다. 테이블 밑의 고양이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은밀하게 새를 가지고 놀고 있다. 피아노에 펼쳐진 악보에서는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하는 내용의 토마스무어의 가사가 보인다. 


한 불륜에 빠진 여인이 자신의 잘못을 어색하게 깨닫고 두 손을 모은 채 일어나고 있는, 약 백하고도 육 십 년 전의 그림이다.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가 과연 창 밖의 무엇을 본 것인지. 과연 그녀가 귀가하는 남편이나 말 많은 이웃집 여자를 본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별로 놀랄 필요가 없다. 그랬을 경우 그녀의 깨어나는 양심은 사회 속 자신의 안위를 위한 위선적인 것일 테니까. 우리가 늘 그러는 것처럼, 회사 안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가장하는 짐승 같은 위선의 포즈일 테니까. 양심처럼 보이는 거짓 양심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녀가 하릴없는 봄 햇살에 놀라는 상상이다. 봄 햇살에 놀라 잠자던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깨우는 모습이다. 그것이야말로 홀만 헌트가 위대한 성화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에서 보여주었던 진정한 세상의 빛을 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등불을 들고 손잡이 없는 문을 두드리며 구했던 바로 그 빛 말이다. 도덕성 회복이라는 무시무시한 테제.  


세상에는 지천으로 빛이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빛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만큼 심각하게 미쳐 있다. 미친 세상에는 미친 양심이 필요하다. 봄 햇살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고 있는 이 미친 양심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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