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나는 런던-74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이 있는 풍경/ 클로드 로랭
Landscape with the Marriage of Issac and Rebecca/ Claude Lorraine
산소가 넘치는 축제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밴덤(1748~1832)의 위대한 가정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미술을 볼 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그림은 과연 어떤 그림일까? 밴덤의 영리한 제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의 추론처럼 만약에 미술에도 고급 행복과 저급 행복이 존재한다면 어떤 그림이 고급 행복을 추구하는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이 무모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감히 필자 입의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술(예술)을 바라 보는 우리의 행복이 많은 것들에 의해 산만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는 예술의 많은 역할을 뺏어간 대중예술, 예컨대 영화나 티브이나 팝 같은 미디어들이 문전성시로 존재한다. 현대 미술이 다수의 행복보다는 소수의 행복에 집착하게 된 것은 그러한 미디어의 홍수와 관련 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 미술은 감상자들에게 보다 많은 학습과 경험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인들에게, 대중예술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시대의 고전들이 오히려 더 편한 행복감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화가의 주관적 경험이나 번민의 흔적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덜 요구되는 것이 고전미술이다. 그 중에서도 풍경화는 종교화나 역사화, 초상화 등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장르에 해당한다. 자연은 시간을 무디게 견뎌내는, 예술의 광활한 채석장이 아니었던가.
풍경화의 위대한 장인 클로드 로랭(1600~82)의 그림은 유독 런던에 많다. 고전의 나라 이태리에서 활동했던 이 프랑스 거장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영국에 끼쳤는지는 새삼 되짚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자연보다 더 자연 같고 자연보다 더 근사해 보였던 그의 풍경화는 영국인들의 자연에 대한 전통에 충격을 주었다. 자연 그대로였던 단순한 영국식 정원들이 보다 더 근사한 자연이 되기 위해 몸부림친 것은 클로드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터너나 콘스터블 같은 영국 최고의 풍경화가들이 열렬히 사모하였던 것도 클로드다. 클로드의 풍경화는 인간이 바라 볼 수 있는 최대한의 자연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상화된 자연을 제시하고 있다. 라파엘의 ‘그림 속의 미’라는 화가의 이상향이 풍경 속에서 정리된 것이 클로드의 풍경화였다.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되고 있는 클로드의 몇점의 걸작 중 하나가 ‘이삭과 라브가의 결혼이 있는 풍경(1648)’이다. 마치 파라다이스의 풍경처럼 노곤한 그림이다.
방앗간(The Mill)’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그림이다. 성경 속의 유명한 부부 이삭과 라브가의 결혼을 가미한 풍경화다. 이삭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로, 아브라함의 종이 고향 땅에서 구해온(?) 처녀 리브가와 결혼한다. 이삭과 리브가가 과연 성경적 결혼의 모델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지만 이 글에서 논하기는 좀 그렇다. 이 그림의 진정한 주제를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결혼 후 작은 축제를 즐기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 중 누가 이삭인지 누가 리브가인지 조차 구별해내기 힘들다. 흥겨운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뒤풀이는 아마도 주문자의 요구에 의해 가미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종교적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을 종교화라고 보기는 좀 그렇다.
인간들의 흥겨운 축제를 감싸고 있는 광활한 자연의 매력이 이 그림의 진정한 주제다. 아득하게 펼쳐진 원경의 아스라한 깊이는 클로드 그림이 세상에 대해서 지니는 당당한 가치의 원류에 해당한다. 강물을 지나 먼 산봉우리까지 이어진 이 그림의 깊이는 우리가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심호흡처럼 뻐근하게 벅차다. 나무들의 크기를 이용해 클로드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공간들은 우리로 하여금 공간지각의 시원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풍요로운 가축들의 행렬에서 우리는 포만감을 느낀다. 특히 다리를 건너고 있는 가축에게서 우리는 사랑과 믿음을 풍족하게 얻는다. 중간쯤에 보이는 방앗간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문명을 발견한다. 강물을 떠다니는 배들은 떠다니는 문명의 정체처럼 고요하다. 멀리 보이는 도시나 성의 원경은 두고 온 것들과 두고 갈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은 탬버린을 흔들며 노래하고 춤추고 있다. 노래들은 들리지 않지만 공기에 의해 전도(傳導)되어 온다. 그들의 흥겨운 축제는 먼 곳의 물과 더 먼 곳의 산과 더 먼 곳의 하늘에 의해 깊은 심호흡처럼 생생히 전도되어 온다. 클로드의 그림 속에서 언제나 어색하게 보이는 것은 인간들의 모습이지만, 그 어색하게 표현된 인간들을 구원하고 있는 것은 자연을 묘사한 화가의 시선이다. 누구보다도 넓고 깊게 자연을 바라 보았던 클로드의 풍경은 인간들이 조금 어색하게 논다 하여도 따스하게 품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따스함의 전원은 투명하게 살아 있는 공기, 맞다, 산소다.
산소 때문에 살아 숨쉬는 나무들, 산소로 하여 뛰노는 건강한 가축들, 산소가 있기에 살아 흐르는 청명한 강물, 산소가 없다면 무너져 내려 버릴 것 같은 높은 하늘, 산소 때문에 바라 보이는 먼 산, 그리고 산소를 끌어 안고 축제를 벌이는 사랑스러운 인간들. 산소 때문에 더욱 빛나는 최대 다수의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