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봄이 지나고 여름으로 달음박질합니다. 계절은 예고 없이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처럼 무섭게 앞으로 달려갑니다. 비가 온다고 했는데 비는 내리지 않고,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예고 없이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곤 합니다. 오존층의 파괴로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때아닌 물난리와 눈 폭풍을 만나는 뉴스는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꽁꽁 얼었던 얼음의 빙하와 동토 땅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해수면의 기온이 올라가면서 눈이 오기보다는 비가 내리기도 하고 온도의 상승으로 과거에 잠들어 있는 해충과 바이러스들이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나 세상을 정복하고 있습니다.

 

녹엽성음, 초록 잎이 그늘을 만듭니다. 초록 그늘에 들어서면 안식이 있고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모깃불을 피워놓고 매미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자기도 했던 아련한 추억이 떠오릅니다. 현대의 매미 소리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화가 날 만큼 자극적으로 울어댑니다. 도심에서는 매미 소리로 두통을 호소하기도 하고 낭만으로 들리지 않고 해충으로 신고하여 모기 퇴치처럼 매미 퇴치하는 지자체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의 녹음이 짙어지기 전에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만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일본의 마루오카 마을에서 어머니를 향한 편지글 축제가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어머니에 대한 짧은 글을 편지 형태로 응모했습니다. 수상작들을 모아 <참 다사로운 어머니께>라는 제목으로 2003년 마고북스에서 출판했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편지글 수십 편 중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몇 편이 내 작은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엄니

 미안해

 등에 오줌 안 쌀 테니

 한 번만 더 업어 주"

 

“한 글자 올립니다.

 이름을 모르는 어머니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저는 쉰일곱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왜 남자들 일만 하는 거야?

 남자가 되어 버리면 어쩌려구?”

 

존경하는 선배님과 김포에 있는 "엄마의 봄날"이라는 강원도 토속 한정식집에서 마음 담긴 식사를 하는 동안 다사로운 어머니의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오래도록 불러보지 않았으니, 생각의 저편에 잠들어 있는 엄마를 끄집어내는 몽환의 꿈을 꿉니다. 엄마가 해 주셨던 음식, 빛바랜 기억을 송환할 순 없다지만 지금 곁에 계신다면 엄마 나이보다도 늙은 아들을 위해 이런 음식을 차려 주셨을 것으로 생각 듭니다.

 

짜지도, 맵지도, 자극적이지 않아서 입에 넣고 씹으면 씹을수록 음식 재료의 고유 향과 강원도 특유의 맛을 느끼게 합니다. 음식은 입으로 먹는 것이지만 맛을 느끼는 것은 마음 상태에 의해 결정됩니다. 아름다운 사람,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식사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법입니다. 반면 진수성찬이라 할지라도 불편한 사람과의 식사는 추억이 되질 않습니다.

 

식사하는 내내 꿈을 꾸는 듯했습니다.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가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달려 나오실 듯한 착각을 합니다. 음식에는 추억을 한 아름씩 품고 있습니다. 그것을 먹음으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추억의 아련한 세포가 입안에 터트려져 다시 건강한 세포를 만들어 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어머니 솜씨입니다. 입맛은 어머니에 의해 완성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이 땅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숫자만큼이라 합니다. 어머니가 그리운 것은 어쩌면 어머니께서 해 주셨던 정체불명의 음식입니다.

 

녹엽성음은 마치 어머니의 봄날을 그려냅니다. 어머니 생존의 모습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들이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초록 잎의 그늘이 필요해서인가 봅니다. 강렬한 햇빛을 가려주고 따스한 봄날의 아지랑이 꿈이 새록새록 돋아나게 하는 몽환적 꿈을 꿉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결하게 여겨졌던 초록 잎은 가을이 되면 땅으로 떨어져 새로운 생명을 키워내는 밑거름이 됩니다. 어머니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푸름으로 아들 위로 쏟아지는 적외선들을 막아 주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성장했을 때는 푸른 어머니 잎은 떨어져 아들을 향한 소중한 자양분이 친히 되셨습니다.

 

​바쁜 현대인들을 위한 음식은 모두 초고속으로 만들어집니다. 주문과 동시에 나와야 하고, 그렇게 나온 음식은 최대한 빨리 흡입합니다. 그래서 패스트푸드점들은 불황을 모릅니다. 반면 슬로우푸드를 추구하는 건강한 식당들은 사람들이 꺼리게 됩니다. 엄마의 밥상은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시간은 흘러갑니다.

 

무엇을 먹었는가? 그것을 어떻게 먹는가가 결국 인생입니다. 정결하게 먹을 순 없는가? 거룩하게 먹을 순 없는가? 그것은 어떤 음식이라기보다는 먹는 속도를 늦추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어머니 마음이 담긴 밥상은 배부르게 먹을지라도 살이 찌는 과다 칼로리를 다스릴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밥상입니다.

 

아련한 추억 너머에 잠들어 있는

엄마의 마음 듬뿍 담긴 밥상이

몸서리치게 그립습니다.

 

 

박심원 목사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mail : seemwon@gmail.com

카톡아이디 : parkseemwon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499 영국 생활법률 4회: 임대인이 알아야 할 임대차 기본법 new hherald 2026.07.27
3498 시조 생활 - 양파 스프, 봄 풍경, 첫 손님 newfile hherald 2026.07.27
3497 돌들의 함성 - 대영박물관 #22 파르테논의 헬리오스와 성경적 유일신론의 충돌 newfile hherald 2026.07.27
3496 헬스벨 - 런던 한의원의 호르몬 검사 new hherald 2026.07.27
3495 부동산 상식- 부동산 체인 이해하기 2 new hherald 2026.07.27
» 신앙칼럼 -녹엽성음 초록 잎이 그늘을 만들다 new hherald 2026.07.27
3493 화제의 interview - “영국 정신병원에서 환자 묶었다간 자격 박탈당해요” file hherald 2026.07.13
3492 시조생활 - 깨짐의 미학, 봄날 아침, 거북이 file hherald 2026.07.13
3491 영국 생활법률 3회- : 집을 살 때 변호사는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 hherald 2026.07.13
3490 돌들의 함성 - 대영박물관 #21 라기스의 투석병과 베냐민 지파의 700명 투석병 file hherald 2026.07.13
3489 헬스벨 - 뼈마름의 대가 hherald 2026.07.13
3488 신앙칼럼- 일중즉측 해는 하늘 한가운데 오면 곧 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hherald 2026.07.13
3487 부동산 상식- 부동산 체인 이해하기 hherald 2026.07.06
3486 영국 생활법률 2회- :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반드시 확인해야 할 10가지 hherald 2026.07.06
3485 시조생활 - 귀뚜라미에게 /가는게 시간인가 세월인가 / 잡초라고 file hherald 2026.07.06
3484 돌들의 함성 - 대영박물관 #20 라기스 공성전(Siege of Lachish) — 고대 앗시리아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file hherald 2026.07.06
3483 헬스벨 - 당신의 고혈압이 의미하는 것 hherald 2026.07.06
3482 신앙칼럼- 일일일서 일일일고(一日一書 一日一稿) hherald 2026.07.06
3481 특별기고 - 이란 전쟁 등 최근 국제정세와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 file hherald 2026.07.06
3480 영국 생활법률 2회: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반드시 확인해야 할 10가지 file hherald 2026.06.2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