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 18전시실에 전시된 파르테논 신전 동쪽 박공 조각입니다. 기원전 438~432년경 제작되었으며, 중심 주제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아테나 여신이었습니다.]
대영박물관 18전시실에 들어서면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박공을 장식했던 거대한 대리석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고전기 예술의 절정을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흔히 넓은 의미에서 ‘헬레니즘 미학’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의 헬레니즘 시대보다 앞선 고전기 그리스 작품이다.
이 조각들은 단순한 아름다운 장식물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신체와 자연의 질서를 이상적인 비례로 표현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신들의 세계를 눈앞에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성경적 유일신 신앙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내거나 일정한 형상 안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살아 계시며, 창조세계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파르테논의 조각과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신을 형상으로 붙잡으려는 인간의 욕망과 말씀으로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충돌하는지를 보여 준다.
1. 하루의 시작과 끝을 달리는 신들
파르테논 동쪽 박공의 중심 주제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아테나 여신이었다. 이 사건의 양쪽에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헬리오스와 셀레네가 배치되었다. 왼쪽 모서리에서는 태양신 헬리오스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바다에서 솟아오르고, 반대편에서는 달의 여신 셀레네의 마차가 지평선 아래로 내려간다. 두 마차는 새벽과 밤, 빛과 어둠, 시간과 우주의 질서를 하나의 거대한 장면으로 보여 주었다.
특히 대영박물관에 남아 있는 셀레네의 말머리는 고대 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벌어진 입과 콧구멍, 긴장된 근육과 솟아오른 핏줄은 밤새 달린 말의 마지막 호흡까지 느끼게 한다. 차가운 대리석이 금방이라도 숨을 내쉴 것처럼 보인다. 이는 고전기 그리스 예술이 자연과 생명을 얼마나 세밀하게 관찰했는지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 경이로운 사실성은 태양과 달이라는 피조물을 인격적인 신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종교적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자연의 생명력을 묘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연현상 자체를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신적 존재로 형상화한 것이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아낙사고라스’와 같은 자연철학자가 태양을 신이 아니라 불타는 물질로 설명하려 했다. 파르테논의 헬리오스를 ‘아낙사고라스’의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연을 신화적으로 이해하던 전통과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새로운 사유가 공존하던 시대였음은 분명하다.
[태양신 헬리오스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태양마차를 타고 바다에서 떠오르는 장면을 표현합니다. 이는 새벽과 하루의 시작을 상징하며, 박공 중앙에서 일어난 아테나 여신의 탄생이 우주적인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 ‘셀레네의 말머리’입니다. 기원전 438~432년경 제작된 것으로, 달의 여신 셀레네가 몰던 마차의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2. 보이지 않는 뒷면까지 깎아낸 정성
파르테논 조각들은 지상 약 16미터 높이의 박공에 설치되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사람은 세부를 모두 볼 수 없었고, 건물 쪽을 향한 뒷부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각가들은 감춰질 부분까지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들에게 조각은 관람객을 위한 작품이기 전에 신에게 바치는 봉헌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아도 신들은 모든 면을 바라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칼뱅은 인간의 마음이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우상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우상은 조각가의 손에서 처음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말씀대로 신뢰하기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신을 원하는 마음에서 먼저 만들어진다. ‘마음이 우상을 잉태하고 손이 그것을 대리석과 금속으로 출산’하는 것이다.
3. 성전 입구까지 들어온 태양마차
파르테논이 세워지기 약 200년 전,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도 태양을 위해 바쳐진 말들과 마차가 있었다. 열왕기하 23장 11절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이렇게 기록한다.
“또 유다 여러 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곁 곧 뜰에 있는 내시 나단멜렉의 집 곁에서 제하여 버리고 또 태양 수레를 불사르고.”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도 섬기면서 태양의 힘도 빌리고 싶어 했다. 주변 강대국의 위협 앞에서 태양신과 군사력까지 종교적 보험처럼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혼합주의의 위험이다.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실제적인 안전과 번영은 다른 힘에서 찾는다.
에스겔 8장 16절에는 요시야보다 후대의 또 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동쪽 태양에게 예배했다. 그들은 성전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몸은 성전에 있었지만 시선과 마음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고 있었다. 이 환상은 태양숭배가 한 차례의 개혁으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 끈질긴 유혹이었음을 보여 준다.
4. 요시야는 왜 마차를 불태웠는가
요시야는 태양마차를 문화유산으로 보존하지 않고 불태웠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차지한 우상에 대한 심판이었다. 태양마차는 더 이상 중립적인 예술품이 아니었다. 왕과 백성이 하나님보다 더 신뢰했던 권력과 번영, 군사적 안전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요시야의 불은 “이제 유다는 눈에 보이는 태양과 군사력에 운명을 맡기지 않겠다”라는 신앙고백이었다. 종교개혁은 생각을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말씀보다 더 의지했던 것을 삶의 중심에서 끌어내리는 구체적인 결단으로 나타나야 한다.
돈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는다면 돈이 우리의 ‘태양마차’다. 사람의 인정이 나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면 명예가 ‘태양마차’다. 교회의 규모와 재정, 성도 수가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한다고 믿는다면 성공이 성전 입구를 차지한 ‘태양마차’가 될 수 있다.
예술과 기술도 마찬가지다. 웅장한 건물과 조명, 음향과 영상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다. 말씀을 잘 전달하고 예배를 돕는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예배자가 하나님보다 무대를 기억하고, 성령의 역사를 분위기와 기술로 만들어 내려 한다면 도구는 우상으로 변한다. 예술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창문이어야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가림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론: 오늘 다시 말씀 앞에 서라
성경은 요시야를 흠 없는 영웅으로 끝맺지 않는다. 훗날 그는 애굽 왕 느고의 경고를 듣지 않고 므깃도 전투에 나갔다. 역대하 35장 22절은 그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싸우다가 죽었다고 기록한다. 어제 태양마차를 불태운 사람도 오늘 자기 판단과 힘을 의지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은 새로운 유행을 계속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교회와 성도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부흥과 업적, 전통과 명성이 오늘의 불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내 삶의 성전 입구에는 어떤 태양마차가 세워져 있는가?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앞에서 빛나는 그 무엇을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대리석으로 만든 태양마차는 아름답지만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를 어둠에서 건지시는 분은 태양의 형상이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과 문화를 파괴하는 불이 아니라, 그것들을 우상으로 만드는 탐욕과 불신을 태우는 회개의 불이다. 교회의 모든 예술과 기술과 사역은 자신을 감추고 오직 그리스도만 밝히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파르테논의 헬리오스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오늘의 교회에 남기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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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전공수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