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주어진 일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행복은 땅끝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일상의 무게감에 짓눌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터전 삼을지라도 주어진 일상에 행복은 숨죽여 웅크리고 있습니다. 행복을 인정하면 행복은 더 큰 행복으로 성장합니다.
행복은 마치 작은 씨앗과 같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씨앗이지만 그 씨앗이 발아 하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 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 행복은 열매란 완성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씨앗으로 주어집니다. 열매와 씨앗은 본질상 같은 것이지만 가치관이 다를 뿐입니다.
열매는 현실을 위한 것이지만 씨앗은 미래를 위한 현실의 견딤입니다. <농부아사 침궐종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농부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씨앗은 보존한다.’라는 농부의 숙명적 철학이 담긴 말입니다. 열매는 현실을 즐겁게 하지만 씨앗은 미래를 위해 현실의 즐거움을 유보해야 하는 인내의 열매입니다.
행복은 새의 날개보다 가볍다는 의미로 자기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행복하게 된다는 말로써 ‘복경호우’라는 장자의 말입니다. 장자는 기원전 369년 전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천지는 나와 더불어 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다.”라는 삶과 천지 만물을 분리하지 않는 일치의 사상을 펼쳤습니다.
휴게소 작은 수족관 앞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열대어들은 수족관 세계를 구석구석 누비며 생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상은 일 미터 남짓한 수족관이 전부입니다. 이 끝에서 저 끝인 세상 끝을 향해 헤엄친다 해도 잠시 잠깐일 뿐입니다. 한 발짝 크게 내디디면 정복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일 뿐입니다.
그들은 수족관 밖의 세계를 흠모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수족관 밖을 동경했다면 수족관은 고통의 현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상, 비록 작은 수족관이지만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넓이와 깊이, 높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궁무진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삶의 터전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상이 그러합니다. 비록 누군가의 눈에는 답답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곳에서 행복을 찾고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천혜의 푸른 초장입니다. 삶의 한 부분을 떼어 미래를 위해 씨앗으로 구분해 놓습니다. 미래를 위해 현실의 안락함과 즐거움을 유보합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나요? 누군가 묻습니다. 행복은 저 하늘에도 없습니다. 에덴의 동쪽 어딘가에 있을 무릉도원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내가 사는 삶의 현주소인 수족관 안에만 존재합니다. 이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수족관 밖에 존재하는 행복이란 잡을 수 없는 허상의 무지개일 뿐입니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손에 잡을 수 있는 어떤 형태가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 삶을 가치를 더해 주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라 불리는 형이상학적 에너지입니다. 주어진 일상에서 행복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행복한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