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 전시실 한가운데, 검은 돌기둥 하나가 서 있습니다. “블랙 오벨리스크.” 가까이 다가가면 조공 행렬이 층층이 새겨져 있고, 어떤 이는 땅에 엎드려 있습니다. 왕은 활을 쥐고 파라솔 아래 서 있습니다. 이 돌기둥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왕이 세상을 지배한다.” 제국은 이렇게 권력의 기억을 돌에 새깁니다.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Ⅲ)의 ‘블랙 오벨리스크’ (기원전 858–824년) - 고대 도시 님루드(Nimrud)에서 발견되었고, ‘살만에셀 건물(Shalmaneser Building)’ 근처에서 발견. 이 오벨리스크는 살만에셀 3세가 죽기 직전, 님루드 중심부에 세워졌습니다. 내용은 왕의 군사 원정(정복 활동)을 기념하는 것이며, 사방 여러 지역에서 조공(tribute)이 바쳐졌다는 사실을 그림과 글로 보여줍니다. 각 장면 옆에 설명문(캡션)이 붙어 있어서 “어느 지역이 어떤 조공을 바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블랙 오벨리스크에는 성경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북이스라엘 왕 예후입니다.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Ⅲ)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후는 성경에 나올 뿐만 아니라, 예후의 이름과 조공 장면은 앗시리아의 돌에도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소설이 아니라, 실제 역사 위에 서서 기록된 말씀임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줍니다. 성경은 고대 근동의 모든 왕을 열거하려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을 어떻게 지키시고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구속사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어떤 제국의 왕은 언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목적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만이 아닙니다. 역사는 관점을 가집니다. 앗시리아는 자기 관점으로 사실을 배열하고 해석합니다. “조공 → 복종 → 왕권의 정당성.”
오벨리스크는 승자의 기록이자 선전물입니다. 반면 성경은 같은 시대를 전혀 다른 잣대로 읽습니다. 성경은 “누가 이겼는가?”보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이었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앗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는 “왕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기억을 돌에 새겼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를 붙드신다”는 것을 말씀에 새겼다.
같은 시대를 다루지만, 제국은 권력의 기억을 만들고, 성경은 구속사의 의미를 밝힙니다.
이 관점에서 오벨리스크의 꼭대기는 더욱 상징적으로 보입니다. 계단처럼 층층이 올라간 상부는 “하늘로 올라가는 단계” 같습니다. 마치 인간이 만든 하늘 사다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인간이 만든 사다리로 내가 하늘에 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은혜로 인류 구원 역사가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인간이 만든 하늘 사다리(제국의 위엄)인가?”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은혜의 길(구속사)인가?”
이 질문은 예후의 이야기에서 더 날카로워집니다. 성경은 예후를 ‘질주하는 인물’로 소개합니다. 파수꾼이 멀리서 달려오는 마차를 보고 말합니다.
“파수꾼이 또 전하여 이르되 그도 그들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가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왕하 9:20).
이 표현은 단순한 운전 습관이 아니라 예후의 통치 스타일을 예고합니다. 예후는 천천히 풀지 않습니다. 기다리며 분별하지 않습니다. 속도로 밀어붙이고, 돌파로 해결하며, 공포로 정리합니다. 아합의 집을 쓸어버리고, 이세벨을 심판하며, 바알 제사장들을 모아 한꺼번에 몰살시키는 사건까지—모든 것이 ‘미친 듯한 해결’로 이어집니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신앙의 열심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예후는 바알은 제거했지만,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후는 여호와의 율법을 진실한 마음으로 지켜 행하지 않았습니다(왕하 10:31 요지).
여기서 핵심은 ‘열심’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입니다. 예후의 질주는 하나님께로 향한 진실한 마음의 질주가 아니라,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질주였습니다. 예후는 눈에 띄는 우상은 치웠습니다. 하지만, 정권을 지탱하는 구조적 우상(금송아지 체계)은 남겨두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해결”했지만 “마음을 해결”하지 못한 왕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때 블랙 오벨리스크의 한 장면이 예후의 내면을 드러내는 거울이 됩니다. 예후가 제국의 왕 앞에 엎드려 조공을 바칩니다. 이것은 외교적 현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 질문은 외교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의지하는가?”입니다.
국내에서는 미친 듯이 달려 강한 왕이 되지만, 국제 질서에서는 더 강한 왕 앞에 엎드리는 왕. 예후는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무릎 꿇지 못했고, 그 공백은 결국 다른 무릎 꿇음으로 채워집니다. 인간은 누구 앞엔가 무릎을 꿇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으면, 더 큰 안정과 보장을 주는 그 무엇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예후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달립니다. 사역을 위해, 가정을 위해, 생존을 위해, 미래를 위해 달립니다. 달리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왜 달리는가?”입니다. 불안과 통제욕이 우리를 달리게 만들 때, 속도는 능력이 아니라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 경고가 필요합니다.

[조공이 온 지역(위에서 아래 순서) - 오벨리스크의 조공 장면은 위에서 아래로 다음 지역을 보여준다고 안내문이 설명합니다.
1. 길자누(Gilzanu) — 오늘날 이란 서부 지역
2. ※ 이스라엘 왕 예후(Jehu) ※
3. 무스리(Musri) — 아마도 이란 동부 지역일 가능성
4. 수히(Suhi) — 유프라테스 중류 지역
5. 파티나(Patina) — 오늘날 터키 남부 지역
즉, 살만에셀 3세가 “사방에서 조공이 올라온다”는 제국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대표 장면으로 배열해 둔 것입니다.
특히 2번째 ‘예후’가 무릎을 꿇고 업드려 절하는 장면이 본 칼럼의 주제입니다.]
속도는 능력일 수 있으나,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속도는 우상이 된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해결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결국 블랙 오벨리스크 앞에서 우리는 성경을 더 믿게 됩니다. 성경이 역사를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역사를 하나님의 손안에서 재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제국이 세운 사다리로 하늘에 오르려 하지 맙시다. 그것은 바벨탑의 꿈을 반복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로 오히려 내려오십니다—율법과 선지자의 약속을 따라,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니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때 우리의 속도는 불안의 질주가 아니라, 십자가를 따르는 믿음의 걸음으로 바뀝니다.
예후의 마차는 빨랐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돌아올 수 있습니다. 돌에 새긴 제국의 역사 자랑 기억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새긴 인류 구원 역사의 참된 뜻을 깨닫게 될 때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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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전공수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