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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오늘 필자는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하고 싶다.

“왜 어떤 역사는 말해지지 않을까?”

분명히 있었던 사실들인데, 누군가는 침묵하기를 원한다?

 

분명히 역사 가운데 있었던 사람인데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시간이 지나서 잊혀진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운’ 기억일 때가 많다.

 

개인도 그렇다. 마음 아픈 일, 부끄러운 일, 실패한 일은 기억 속에서 슬며시 지워 버리고 싶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도, 제국도,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자존심이 상하는 기억, 체제가 흔들린 기억은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

 

필자는 이 질문을 대영박물관의 한 유물 앞에서 다시 마주한다. 고대 이집트의 왕명표(King-list)는 왕들의 이름을 줄줄이 새긴 돌이다. 겉으로는 단순한 명단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역사책”이 아니라 정통성의 선언문이다.

 

“나는 정통 왕이다.”

“나는 올바른 계승자다.”

“나는 흔들리지 않은 왕권의 흐름 위에 서 있다.”

 

그런데, 그 돌을 자세히 보면 더 무서운 메시지가 보인다. 어떤 이름들은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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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list(왕명표)는 “전체 역사”가 아니라 “편집된 역사”이다. 왕명표는 모든 왕을 다 넣지 않는다. 후대가 정통이 아니라고 본 왕, 정치·종교적으로 불편한 왕, 때로는 통치 여왕(예: 하트셉수트) 같은 인물들이 의도적으로 제외되기도 한다. 즉, 왕명표는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이 왕들만이 ‘공식 역사’다. 이 흐름이 정통이다.” 그래서 왕명표를 읽을 때는 무엇이 새겨졌는가뿐 아니라 “무엇이 빠졌는가(누락/제외)”가 매우 중요하다.]

 

 

 

1. King-list(왕명표)와 ‘기억권력’

 

왕명표는 왕들이 자기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전 왕들의 이름을 신전에 새긴 목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누가 들어가고, 누가 빠지는가?”

왕명표는 “모든 왕”을 기록하지 않았다.

후대에 “중요하지 않다”, “정통이 아니다”라고 판단된 왕들은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대영박물관 설명문도 그 점을 분명히 말한다. “중요하지 않거나 정통성이 없다고 여겨진 통치자들(통치 여왕 포함)은 제외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운다. 기억은 중립이 아니다. 기록은 항상 권력을 가진 자의 편집이다. 그리고 그 편집은 늘 이런 선언을 포함한다.

 

“우리는 흔들린 적 없다.”

“그들의 시대는 정통이 아니다.”

“우리가 정통이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는 ‘기억 권력’이라는 것이다. 기억을 소유하는 자가 역사를 소유한다. 역사를 소유하는 자가 사람들의 정체성을 소유한다.

 

2. 지워진 왕들의 이름을 부르다

 

필자는 오늘은 지워진 이름들을 일부러 불러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워진 자를 다시 부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1) 설명문 ‘1’에서 지워진 통치자

 

King-list(왕명표)에서 지워진 한 이름은 바로 하트셉수트(Hatshepsut)이다. 하트셉수트는 제18왕조의 여성 통치자로, 왕처럼 통치했다. 그런데 후대의 어떤 통치자는 그 이름이 불편했다. 그래서 하트셉수트의 이름은 빠졌다.

 

(2) 설명문 ‘2’에서 지워진 통치자들

 

그리고 또 하나의 빈칸, ‘2’에는 아마르나 시대와 연결된 네 명의 통치자가 빠져 있다. 대영박물관 설명문이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아크나톤(Amenhotep IV / Akhenaten)’, ‘스멘크카라(Smenkhkare)’, ‘투탕카문(Tutankhamun)’, ‘아이(Ay)’.

 

이 이름들이 통째로 빠져 있다는 것은 그 시대가 “없었던 것처럼” 처리되었다는 뜻이다.

 

이건 단순한 역사 편집이 아니라 정통성의 정치를 말한다.

“그 시대는 잘못된 시대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그러니 그들은 우리 기록에 남을 자격이 없다.”

 

이것이 ‘기억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3. 성경—출애굽은 ‘기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이제 우리는 성경 앞에 서야 한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무엇일까?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단지 “노예들이 탈출했다”가 아니다. 출애굽은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선언하신 사건이다. “나는 여호와라.”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제국의 신들을 심판하시고, 왕권의 오만을 꺾으시고, 억눌린 자를 건져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건을 절대로 잊지 말라고 명령한다. 유월절을 주시고, 자녀가 물으면 설명하라고 하시고, 세대에서 세대로 전하라고 하신다.

 

왜 그럴까? 출애굽은 곧 하나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건진 여호와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원리를 하나 본다.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사건은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잊고 싶은” 사건이 된다는 점이다.

 

제국은 자존심이 상하는 기억을 싫어한다. 제국은 패배의 기억을 싫어한다. 제국은 흔들림의 기억을 기록하기보다 지워 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말한다.

“기억하라.”

“잊지 말라.”

 

4. 출애굽 전기설 관점

 

출애굽의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그러나 필자의 목적은 누구를 논쟁으로 이기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붙들려는 것은 이것이다. 출애굽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실제 구원역사이다. 그 구원은 제국에게 불편한 기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제국은 그 기억을 “기록”보다 “침묵과 삭제”로 다루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전기설 관점에서 보면, 연대기적으로도 출애굽의 충격이 이집트 사회의 종교·권력·기억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증거가 부족해서 출애굽이 약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출애굽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제국은 그것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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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를 다루는 구간. ‘1’은 왕처럼 통치했던 여왕 하트셉수트가 이 목록에서 누락된 지점을 표시한다. ‘2’는 ‘이단적(heretic)’으로 여겨진 아마르나 시대와 연관된 네 명의 통치자가 누락된 것을 표시한다: 아멘호텝 4세/아크나톤, 스멘크카라, 투탕카문, 아이.]

 

 

 

5. King-List(왕명표)를 오늘에 적용: 교회는 ‘삭제의 공동체’가 아니라 ‘기억의 공동체’다

 

이제 이 유물을 통해 질문해 보자. 우리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지우고’ 있지는 않은가? 실수한 사람을, 상처 입은 사람을, 불편한 사람을 기록에서, 관계에서, 대화에서 조용히 삭제하고 있지는 않은가?

 

체면을 위해 진실을 덮고 “없던 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의 정통성은 “흠 없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교회의 정통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예수가 흘리신 피와 쏟은 사랑과 희생에서 나온다.

 

그 십자가는 무엇인가? 세상과 로마제국이 지우고 싶어 했던 사건이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끝내고 싶었던 사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건을 구원의 중심으로 세우셨다. 그리고 주님은 교회에게 기억의 예식을 주셨다. 바로 성찬이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교회는 잊지 않는 공동체이다. 죄를 미화하지 않고, 상처를 삭제하지 않고, 진실을 은혜로 품으며, 우리를 회개함으로 인도하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6. 결론

 

필자는 King-list(왕명표)의 빈칸 앞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질문을 생각해 본다.

“너는 무엇을 지우며 정통을 세우려 하느냐?”

“너는 누구를 삭제하며 공동체를 유지하려 하느냐?”

 

이제 분명히 기억하자.

교회는 삭제로 순결해지지 않는다.

교회는 회개와 은혜로 새로워진다.

교회는 침묵으로 하나 되지 않는다.

교회는 진실과 사랑을 기억함으로 하나가 된다는 점을…….

 

■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글쓴이 전공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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