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왕의 성은 무엇일까요? 영국에 나름 오래 살았지만 대답을 잘 못하시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왕실이 “성을 안 쓴다”기보다 평소엔 굳이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surname)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평민들은 성이 없었습니다. 성은 원래부터 모든 사람의 기본값이 아니라, 사람을 구별하거나 가문·재산을 표시해야 했던 일부 계층에서 먼저 필요해진 장치였죠. 그런데 평민만 성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귀족을 뛰어넘는 왕족도 사실 성이 필요 없었습니다. 왕족은 숫자 자체가 흔하지 않으니 이름과 칭호만으로도 구별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왕족은 개인의 성 대신, 왕조(가문)의 명칭을 성처럼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름은 레오나르도이고, 다 빈치는 성이 아니라 ‘빈치에서 온’이라는 뜻의 출신 표기였습니다.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이 많으니, “어느 레오나르도냐”를 구별하려고 빈치 출신을 붙인 것이죠.
그렇다면 영국 국왕의 성은 무엇일까요? 영국 왕실은 한때 독일계 왕조명인 작센-코부르크-고타(Saxe-Coburg and Gotha)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 이름은 곧바로 문제가 됩니다. 젊은이들이 독일군과 맞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상황에서 왕실의 이름이 독일식이라니요? 결국 1917년 조지 5세는 왕실의 이름을 영국식인 윈저(Windsor)로 바꿉니다.
다만 결혼 관습이 또 문제입니다. 필립 공도 왕족이기에 원래 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본래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립으로 불리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엘리자베스와 혼인을 앞두고 영국 사회 안에서 신분을 새로 정리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귀화 절차를 밟자 갑자기 공식 서류에 쓸 성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외가 쪽 가문 이름인 Battenberg를 택했는데, 이것 또한 독일식 표기라 영국식 형태인 Mountbatten(마운트배튼)으로 바꿔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왕실의 가문 이름까지 남편 성으로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왕실의 집안 이름은 윈저로 유지하되, 성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남편 쪽을 반영한 마운트배튼-윈저(Mountbatten-Windsor)라는 형태가 생겨납니다. 결국 찰스 3세도 평소엔 성을 거의 쓰지 않지만, “국왕의 성이 뭐냐”는 질문에 가장 현실적인 답은 이쪽에 가깝습니다. 왕실조차도, 서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성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있는 셈입니다.
김준환변호사
법무법인 폴라리스 영국지사장
전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