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년 여름, 나일 삼각주 로제타 근처의 오래된 요새에서 프랑스 공병 장교 부샤르는 검은 돌 한 조각을 발견했다. 그 돌—후일 로제타스톤이라 불리게 된 그것—은 세 가지 문자, 상형문자·민중문자·그리스어로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에는 누구도 그 돌이 인류 문명의 문을 다시 여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작은 돌은 문자가 지닌 힘과, 그 힘을 독점했던 지배계층의 특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인류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문자는 단순한 기록의 도구가 아니다. 문자는 인간이 세계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며,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다. 고대 이집트에서 상형문자는 일상 언어가 아니라 신전과 왕실을 위한 신성한 언어였다.
이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의 제사장과 서기관뿐이었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기록하고, 세금 장부를 관리하며, 역사를 보존하고, 종교적 권위를 해석하는 특권을 누렸다. 문자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신의 뜻과 왕의 권력을 해석할 수 있는 자격이었고, 그 결과 문해력은 지배의 핵심 자원이 되었다.
대다수 백성은 문자를 읽지 못했다. 그들에게 문자란 신전의 벽화처럼 신비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에 불과했다. 그 상징 뒤에 어떤 정치적 의도, 어떤 법적 내용, 어떤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단지 “기록된 규칙을 따르라”라는 명령을 받을 뿐이었다. 결국 문자화된 지식은 지배계층의 독점물이었고, 문맹 상태는 자연스럽게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로제타스톤이 가진 진정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상형문자는 수천 년 동안 그 의미를 잃어버렸고, 피라미드와 신전 벽면의 기록은 침묵한 언어로 남아 있었다. 문자는 있었지만, 읽는 자가 사라진 시대. 문자가 사라지면 역사가 사라지고, 역사가 사라지면 문명 자체의 목소리가 사라진다. 이집트문명은 문자라는 문을 통해 왕과 신의 권위를 보존했지만, 그 문이 잠긴 순간 그들의 세계도 함께 침묵에 잠겼다.
이 침묵을 깬 인물이 바로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다. 그는 로제타스톤의 그리스어·민중문자·상형문자를 비교하며 마침내 카르투슈 안에 새겨진 왕의 이름을 해독해 냈다. 그 순간 그는 “Je tiens mon affaire!”, “I’m handling my business!”, “드디어 해냈다!”라고 외쳤다.
그의 발견은 단순한 언어 해독이 아니라, 3,000년간 닫혀 있던 문명이 다시 말하게 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는 왕의 이름을 해독했을 뿐만 아니라, 문자의 권력이 지닌 벽을 무너뜨렸다. 샹폴리옹의 해독으로 문자에 접근할 수 있는 자만이 권력을 행사하는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고, 인류 전체가 공동의 유산을 읽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문자의 힘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디지털 시대의 문자는 더 이상 돌이나 파피루스에 새겨지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 데이터, 코드와 같은 새로운 매체 위에 기록된다.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정보화 사회에서도 ‘읽을 수 있는 자’와 ‘읽지 못하는 자’의 격차는 곧 권력의 격차다. 데이터를 해석할 줄 아는 사람, 기술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 정보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은 새로운 시대의 지배층이다. 반대로 표면적 글자만 읽고 그 의미와 구조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현대인은 고대 이집트 민중과 다를 바 없이 “기록되는 존재”로 남게 된다.
문해력(literacy)은 단순히 문자를 해독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고, 사회 구조를 파악하고, 권력의 흐름을 읽고, 나아가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능력이다. 문자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은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를 설명하며, 미래를 설계한다.
문자 없는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문해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인의 생존 능력이자, 사회 전체의 안전망이며, 문명의 지속성을 지탱하는 핵심 요소다.
고대 이집트에서 문자와 권력은 하나였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문자를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신 새로운 형태의 ‘문해력 불평등’이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정보화 시대의 변두리에 머문다.
로제타스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문자를 읽는 능력이 권력을 만든다. 그러나 그 능력을 모두에게 나누는 순간, 문명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문명은 기록 위에 세워지고, 기록은 읽는 자에 의해 살아난다. 로제타스톤이 깨우쳐준 진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읽을 수 있는 자가 세상을 해석하고, 해석하는 자가 세상을 움직이며 지배한다.
말씀을 읽을 줄 아는 자
이 진리는 단지 고고학의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라는 거대한 텍스트 앞에서도 똑같이 유효하다. 성경은 때로 그 해석이 난해하게 느껴진다. 성경은 고대 언어들로 기록되었으며, 수천 년의 시간과 문화적 거리를 품고 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책”이 아니라 “닫힌 책”처럼 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그 문장이 해석되기 시작하는 순간—믿음이 자란다. 이해는 믿음의 씨앗이며, 해석은 믿음을 적용하는 출발이다.
실제로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난다”(롬 10:17)라고 말한다. 들음은 단순한 청각적 행위가 아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일’, 곧 영적 문해력을 의미한다. 말씀을 해석할 수 있을 때 믿음이 태어나고, 그 믿음은 다시 삶을 변화시킨다. 성경의 문장은 이해를 통해 생명으로 연결되는 길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신 후,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열렸다. 그들은 비로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자’가 되었고, 그 순간부터 제자들은 믿음을 확신하였으며, 그 확신은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며, 그분의 뜻을 해석하는 행위다. 그리고 이 해석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한다.
슬픔 속에서도 소망을 읽게 하고,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발견하게 하며, 절망 속에서도 길을 보게 한다. 말씀이 이해될 때 믿음은 눈을 뜨고, 믿음이 눈을 뜰 때 우리는 영원한 삶을 향한 길을 걷기 시작한다.
로제타스톤이 잃어버린 문명을 되살렸듯, 성경의 바른 해석은 잃어버린 영혼을 되살린다.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자가 영적 세계를 해석하고, 그 해석이 곧 영원한 생명으로 길로 이끈다. 이것은 로제타스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값진 교훈이다.

[1799년 7월, 나일 삼각주 로제타(Rashid, Rosetta) 근처의 생줄리앵 요새(Fort Julien) 복원 작업 중 Pierre-François Xavier Bouchard(피에르-프랑수아 부샤르) 중위에 의해 발견됨. 그러나 1801년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패퇴시키면서, 로제타스톤은 전리품으로 영국으로 왔고,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있다.]

[카르투슈(cartouche)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왕의 이름을 둘러싼 타원형의 선”을 말한다. “이름이 카르투슈 안에 있다”라는 것은 왕이 신의 보호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 ‘cartouche’(카르투슈)는 프랑스어로 “총탄집(탄피)”를 뜻하며,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던 프랑스 병사들이 이 타원형 문양을 보고 “탄피 모양 같다”고 표현한 데서 유래했다.
샹폴리옹(Champollion)은 로제타스톤을 연구하던 중 상형문자 속 타원형 표시, 즉 카르투슈 안의 문자가 왕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리스어 본문에 나온 왕의 이름 Ptolemaios(프톨레마이오스)가 상형문자 부분의 카르투슈 안에 대응된다는 점을 발견했고, 그 후 필래 섬의 오벨리스크에서 클레오파트라(Cleopatra)라는 이름을 같은 방식으로 찾아내어 문자 해독의 열쇠를 완성했다.
카르투슈는 이름의 신성함과 보호를 나타낸다. 이집트인들은 “이름을 남기는 것”이 존재의 불멸이라 믿었다. 그래서 왕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카르투슈로 감쌌다. 이는 성경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이사야 49:16). “하늘에 기록된 자들”(누가복음 10:20).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상징이 카르투슈의 개념과 놀랍게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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윔블던코너스톤교회 전공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