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때 군사정권이 지배하면서 미래가 암울한 때가 있었습니다. 자유를 박탈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했으며 언론은 권력자의 하수인이 되거나 힘 있는 자들을 찬양하는 하수인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글로써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고 작은 빛이 되는 것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민족적으로 암울했던 늪에 빠져 허덕이며 길을 잃고 있었던 민족에게 하얀 머리카락과 도포 자락 휘날리며 토설하는 도인이 있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입니다. 그의 외침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몇몇 힘 있는 자들의 군홧발에 짓밟혀 길을 잃고 있을 때 그의 외침은 마음을 찔렀으며 잠자는 자들을 일깨웠웠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은 있다."
길은 사람입니다. 길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없는 것이며, 길을 잃었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잃은 결과입니다. 길이 끝났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존경받을만한 지도자가 없음을 뜻하는 뼈아픈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음을 노래하는 것은 바알이라는 권력과 재력, 총칼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봄길을 노래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시인이 노래하는 길은 사람 존재 자체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 중에 <그 사람을 가졌는가> 다시금 떠 오릅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길이 열리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가졌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만릿길 나서는 날
처자들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어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있으니'하며
방긋이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벗님과 짧은 여행을 합니다. 하늘을 보고, 숲을 보고 달리는 차창을 내다 보며 주제 없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높이 떠서 자신의 존재를 구름으로 남기며 사라지는 비행기를 올려다 봤습니다. 순간적이 찰나의 시간이지만 하늘에도 길이 있음을 공감했습니다.
벗님은 하늘길을 보며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우리는 땅의 길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많은 종류의 길들이 있습니다. 차가 다니는 길인 차로, 배가 다니는 길이 항로, 비행기가 다는 길인 공로, 그러나 나는 하늘 길을 만들고 싶습니다. 하늘길은 단순히 공로를 의미하지 않고 그 너머의 하늘에 꿈과 소망이 담겨 있는 소망의 꿈의 길을 의미합니다." (정복순 님의 블로그)
하늘길, 함석헌 선생, 정호승 님, 벗님의 소망하는 꿈의 길이 어우러져 머릿속에서 길이 새로운 길이 연결됩니다. 함석헌 선생의 길에 관한 이야기와 그 사람을 가졌는가에 대한 시입니다. 정호승 님의 봄 길이 스쳐 갑니다. 길은 생각의 연결이기도 합니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 쉼 없이 길을 만들어 내는 약 5억 개나 되는 신경전달물질인 시냅스들의 대합창 연주가 시작됨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인생길이 만큼 길을 걸어왔습니다. 때론 길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 길을 사랑하기도 했으며 또한 그 길에 서 있음을 원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길은 인생의 역사입니다. 역사의 걸음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며 피의 걸음이기에 선명하게 피로서 역사를 써내려갑니다. 나는 누군가가 걸어간 길을 따라 걷는 것이며 내가 걸은 길은 또 누군가를 위한 이정표가 됩니다.
길을 걷고 있지만 나 자신 자체가 길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늘 넘어지고 쓰러지며 부족함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생명의 주체께서는 자신을 일컬어 길이라 하셨습니다. 길이며 생명이며 진리라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일컬어 길 자체가 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길 자체라 하는 그분이 창조주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저 그 길을 묵묵하게 걸어갈 뿐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은 있습니다. 절망의 끝에 길이 시작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절망의 절벽에 서 있을 때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더는 피할 수 없는 절벽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내게 하늘길을 열어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은 시작됩니다.
박심원 목사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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