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딸아이의 결혼 기념일입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딸아이는 내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내 영혼의 분신입니다. 엄마를 닮기보다는 아빠를 닮아서 아빠의 붕어빵이란 소릴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딸아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 누군가 '아빠 붕어빵이네!'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하여 그렇게 말한 사람을 지극히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지금이야 스마트 폰의 안면 인식이 정확하여 쌍둥이 일지라도 안면 인식할 수 없지만 홍채 인식 없이 안면 인식만으로 인증할 때는 딸 아이가 내 안경을 쓰면 인식이 될 만큼 꼭 빼 닮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사님 안 계실 때는 딸아이가 아빠의 옷을 입고 설교하면 될 것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는 아빠를 닮았다는 말은 딸에게 있어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 중 하나였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닮음은 희석이 되었지만 딸 생각엔 키 작고 통통한 아빠를 닮은 것보다는 늘씬하고 예쁜 엄마를 닮은 것이 좋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젊은이들과 한 식구가 되는 공동체 사역을 했습니다. 19살 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이 제자가 되어 달라며 큰절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제자 겸 믿음의 아들이 되어 20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딸아이는 그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습니다. 제자인 기문이는 늘 딸아이를 놀리곤 했습니다. 딸아이가 두 번째 싫어했던 것은 제자 기문이의 장난과 놀림이었습니다. 밥을 먹는 중에는 기문의 장난은 계속되었습니다. 딸아이가 먹으려는 계란말이에 젓가락이 갈 때쯤 기문의 긴 팔로 먼저 집어가면 딸아이는 으앙 하고 울어 버렸습니다.
기문이가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예랑이를 울리는데 3초면 된다 했습니다. 둘은 항상 티격태격하며 기문이는 딸아이의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기문이는 제자로 시작해서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를 낳아 주신 부모보다 그의 인생이 나와 더 많이 살아가면 멋진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여러 곳에서 중매가 들어왔고, 어떤 자매는 직접 대시를 해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문이는 마음에 결정한 자매가 있다는 고백으로 선과 대시를 거절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기문의 마음에 있는 자매는 누굴까. 어느 날 기문이는 제게 무릎을 꿇어 큰절하며 자기 영혼을 바쳐 평생 예랑이를 책임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의 꿇은 무릎이 어찌나 떨리던지 덜덜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기문아, 네 마음에 품은 여인이 예랑이었니'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기문이는 제자에서 믿음의 아들로, 믿음의 아들에서 사위가 되어 7년을 살았습니다. 만 6살 아들과 3살 된 딸, 그리고 12월 30일에 태어날 셋째 공주까지 둔 세 명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꿈같은 결혼 7년을 마치고 8년 차가 시작되던 즈음에 그는 홀연히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까지 식사하고 두 부부는 영화를 보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잠들기 전에 다음날 출근을 위해 준비해 놓고 감기 기운이 있다 하여 용각산 한 스푼 털어 넣고 잠들기 전 주변의 힘든 사람들을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어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다음날 새벽 늦잠을 자는 사위를 딸 아이가 깨웠지만, 그는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로 홀연히 이사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놓고 많은 사람은 당혹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신앙생활 잘하고 믿음이 좋은데 왜 하나님은 그를 데려가셨을까? 그 물음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담판을 짓고 내 목숨을 대신 받으시고 사위를 돌려보내 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 계신 한 지인 목사님은 이 땅에서 보다 하늘나라에 더 필요한 존재이기에 그 아들을 먼저 데려가셨다는 지극히 이론적이며 존재론적인 해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꿈같은 결혼 생활 7년을 넘어 8년 차가 되어 갈 무렵 딸아이는 남편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미망인이 되었습니다. 결혼기념일을 축하할 수도 없이 딸 아이와 함께 장례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딸 아이를 위로해 줄 수 있을지,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언어로는 위로의 단어나 문장으로 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냥 옆에서 함께 울어주고, 함께 먹고, 함께 하는 것 밖엔 없기에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장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살아온 만큼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도 없으며 무한대의 시간이라 하여 그 시간을 내 임의대로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세상 전부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딸아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더 긴 인생을 앞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 자녀의 엄마로서 아빠를 닮은 붕어빵 딸로서 이제는 남편의 장난을 그리워하며 긴긴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젊은 미망인이 되었습니다.
인생은 앞으로 해석해 낼 수 없습니다. 살아온 길을 뒤 돌아보면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서둘러 앞날을 해석할 이유도 없고 한 걸음씩 주어진 길만큼만 인생은 걸어갈 수 있습니다. 내 발의 등이요 빛이 되어 주시는 진리를 따라 한 걸음씩 걸을 수 밖엔 없습니다. 그렇게 내 인생에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벗에게 오히려 인간적이며 신앙적이라 생각하는 지극히 당연한 해석이 고통을 증가하게 됩니다. 고난 중에 있는 벗을 위해 함께 울어주세요, 그 고통을 지탱할 수 있도록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세요. 그리고 그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는 함구해 주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위로입니다.
박심원 목사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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