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이 다르지 않습니다. 살아 보니 행복인 것 같았으나 불행이 되기도 하며, 불행이라 생각했던 것이 큰 행복이 되기도 한 일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라고 역설했습니다. 행복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면 결국 불행도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이며 사회철학자인 ‘루소’ 역시 행복과 불행이 다르지 않음을 주장했습니다. “불행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지만, 수업료가 비싸서 그로 말미암은 보상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지급한 학비를 초과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그 뿌리가 하나입니다. 한 뿌리에서 전혀 다른 열매가 맺히는 신비한 삶의 법칙입니다. 사과나무에서 배가 열릴 수 없고, 배나무에서 감이 열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것이 행복과 불행의 역학관계입니다. 행복이란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인류의 시작부터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다만 그 언어가 보편화 된 것은 20세기가 들어서였습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철인들이 말했던 행복은 그리스어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입니다. 이 말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좋은’ 이란 말과 ‘영혼’이라 말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이란 ‘영혼이 좋아야 한다.’ 혹은 ‘영혼이 잘 돼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결코, 외부의 환경이나 상황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행복이 생성되는 것으로 마치 행복은 유기체적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그리스 철학자들이 동경했던 행복을 정확하게 언급한 말씀이 사도 요한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1장2절) 철인들이 추구하고 갈망했던 행복의 근원에 대한 풀리지 않았던 숙제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도 요한은 철인들의 의문에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은 40여 년간 터키에서 생활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 처형장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부탁받은 것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을 자신의 모친으로 섬겨야 하는 특명을 받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서운 핍박으로 대부분이 순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 만큼은 마리아를 모시고 터키 지역으로 숨어 생활했습니다. 모친이 소천하기까지 40여 년간을 지내면서 그가 공부한 것은 그리스철학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모친에게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당시에 책이 귀한 시대이니 요한의 제자인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Polycarp, 69-155)은 책을 구해 오는 것이 그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구한 책은 신앙 서적이 아니라 철학에 관한 책이 주류였습니다. 요한은 그 책을 통하여 인류가 추구하는 것이 행복 즉, ‘에우다이모니아’ 임을 간파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정치, 권력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경제력이나 건강이 행복을 지탱해 주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안에서부터 시작됨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육체를 아무리 잘 가꾸고 편리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고 할지라도 결코 인간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면 환경이 힘들고 거칠다 할지라도 영혼이 바르게 서 있다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삶의 환경이 불행과 같다 할지라도 그것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영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철인들은 막연한 행복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의 갈증을 영적인 것으로 해소해 준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인간과 함께 존재해 왔습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물질은 파동, 혹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믿었습니다. 어떤 것은 파동으로, 또 어떤 것을 입자로 구성된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현대 물리학인 양자 역학에서는 모든 물질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관찰자에 의해 파동이 입자로, 혹은 입자가 파동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를 관찰자 효과라 합니다. 최소물질이 관찰자 앞을 지날 때 관찰자의 생각이 파동이면 파동이 되는 것이고, 입자라 생각하면 입자가 되는 것입니다. 관찰자가 사람이 아니라 카메라에 입자 혹은 파동이라 적힌 카메라를 통과할 때 관찰카메라에 적힌 글대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도 그러합니다. 양자 역학에 의하면 관찰자인 나 자신이 행복이라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불행했던 요소들이 행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믿은 대로 된다는 법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파동과 입자가 본질에서는 하나인 것처럼 행복과 불행도 하나입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관찰자의 영성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고 행복은 더 큰 행복으로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박심원 목사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mail : seemwon@gmail.com
카톡아이디 : parkseem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