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자주 쓰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영국에서는 100년을 역사라고 하지 말고, 미국에서는 100㎞를 거리라고 하지 말고, 한국에서는 100만원을 돈이라고 하지 말라.” 실제 ‘100년은 역사도 아니다’라는 말은 적어도 영국에서는 반박하기 힘든 명제다. 동네 중고서점에서도 100년 전 책을 쉽게 살 수 있고, 100년 된 노포가 시내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거리와 가게들의 역사도 보통 100년이 훨씬 넘는다.
런던에 살지 않는 관광객들이야 특별히 관심을 쏟지 않으면 점포의 역사가 얼마나 되었는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런더너’들은 그런 노포들을 잘 알고 애용한다. 런더너들만이 알고 그들이 자주 이용하는 노포들과 오래된 거리에는 영국의 진짜 역사가 숨어 있다. 영국인들은 그런 노포들을 진짜로 사랑하는데, 그런 사랑을 통해 정체성을 유지해 가면서 오래된 듯한 새것과 새것과 같은 오래된 것들 속에서 살아간다.
신사용품의 거리, 저민 스트리트
대개 세계 대도시에 있는 명품 거리들은 거의 모두 여성 용품을 주로 취급하는 상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런던에는 남성들만을 위한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가 몇 개 있다. 그만큼 영국 남자들의 입김이 세다는 뜻이다. 또 멋을 안 부리는 듯 평범해 보이는 영국 신사들이 사실은 화려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이탈리아 신사들보다 훨씬 더 멋을 부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단지 튀지 않게 애써 숨기는 멋이다.
그런 거리에는 남성복 전문점, 구두점, 끽연도구, 화장품, 시계, 사냥용품, 승마용품 판매점 같은 가게들이 골목길 양쪽에서 오랫동안 영업을 해오고 있다. 물론 남성들이 주로 소비하는 위스키, 포도주를 취급하는 주류상점과 치즈 같은 것들을 파는 식품점도 있다. 그런 거리들은 영국 왕의 주거지인 버킹엄궁 동북쪽에 주로 위치해 있는데 신사 사교클럽 중심지인 팔말 스트리트와 세인트제임스 스트리트 주변에 주로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남성 전용품 상가 거리는 저민(Jermyn) 스트리트이다. 일방통행에 주차도 할 수 없는 약 500m의 좁은 거리 양쪽에는 금방 보아도 역사가 묻어나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저민 스트리트에 들어서면 200~300년 전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고풍스러운 가게들이 정말 런던에 왔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이곳 상점들은 세인트 알반스 백작이 1664년 이 일대에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생겨났다. 개발 초기에는 56개의 건물이 건립되었다가 1675년에는 108개로 늘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1층은 가게들이고, 2층부터 4층은 주거용인 구조다.
그런 주거용 공간에는 유명인사들이 살았다. 예를 들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은 84년의 생애 중 후반 40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현재 그가 한때 살았던 87번지 1층에는 ‘하케트’라는 남성패션 전문점이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유럽 최고의 금융부자인 로스차일드 가문도 한때 여기에 거주지를 두고 있었다. 영국 최고의 총리 윈스턴 처칠의 선조 존 처칠 공작도 이곳을 주거지로 사용하곤 했다.
현재 이 거리에 있는 가장 유명한 명품가게는 세계 신사용품 최고 브랜드인 던힐이다. 1907년에 가게를 연 후 지금까지 같은 장소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 외에도 시가를 비롯해 각종 끽연용품을 취급하는 시가 최고 브랜드 다비도프도 있다. 1797년에 문을 연 뒤 지금까지 같은 장소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치즈전문점 팩스턴앤드휘트필드도 있다. 뿐만 아니라 토머스핑크, 턴불앤드아세르, 힐디치앤드키, 하비앤드허드슨 같은 영국 전통의 멋을 자랑하는 50여개의 각종 신사패션 가게들이 있다.
이곳은 정말 영국식 멋을 내려는 세계 신사들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거리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자랑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는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곳은 거리의 형태도 파리나 로마와는 다르다. 위압감 없이 차 한 대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작은 골목에 런던 특유의 작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영업하는 가게들은 정말 영국 특유의 실용성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용품을 적절한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사실을 자랑과 자부심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이들 상점들은 지점도 없고, 영국 밖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저민 스트리트의 상점들은 왕실에 자신들의 상품을 납품하면서 받은 왕실 칙허 문장을 간판에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다. 진정한 영국 신사용품 브랜드가 궁금하면 이 거리에 무조건 와봐야 한다. 실제 이 거리에는 관광객들은 잘 안 보이고 런더너들만 보인다.
最古 가게들이 모인 세인트제임스 스트리트
저민 스트리트를 벗어나면 왕복 차선의 대로가 나타난다. 찰스가 왕이 되기 전 카밀라 왕비와 같이 살던 버킹엄궁 앞의 세인트제임스궁과 맞닿아 있는 거리다. 이 세인트제임스 스트리트가 바로 팔말 스트리트와 함께 영국 신사 사교클럽들의 본산이다. 여기에 보수당 당원들의 클럽인 화이트와 자유당원들의 클럽으로 가장 오래되고 배타적인 브룩스, 그리고 창설된 지 거의 300년이 다 되어 가는 부들, 최초의 보수당 당사가 있던 칼톤클럽 등이 있다.
이곳의 가게들은 모두 100년을 훌쩍 넘긴 런더너들만 아는 노포들이고 개업을 한 이후 자리를 옮기지 않은 가게들이다. 이런 가게에 관광객들은 거의 오지 않는다. 누구나 알아 주는 브랜드 제품도 아니니 굳이 여기까지 와서 골동품 냄새가 날 듯한 제품들을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1698년에 창업한 베리 브라더스 앤드 러드가 3번지에서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찰스 3세 왕의 칙허 문장을 자랑하는 와인 가게이다. 한 병에 9.95파운드(약 1만7412원)부터 2만파운드(약 3500만원)까지 다양하다. 만일 정말 오래된 가게에서 파는 염가의 1만5750원짜리 와인이 어떤 맛인지 알아보려면 한번 방문해 볼 만하다. 더욱이 300년 전 영국인들이 와인을 사던 가게가 어떠했는지 구경도 할 겸 말이다.
9번지엔 존롭이 있다. 1866년 개업해서 이제 ‘겨우’ 158년이 된, 이 동네에서는 ‘신생 가게’ 취급을 받는 구두와 장화 가게이다. 직접 현장에서 제품을 주문받아 수제로 만들어 판다. 물론 기성품도 판다. 가격은 5000파운드(약 875만원)를 호가한다. 구두를 안 신을 때 발 원형을 보존하기 위한 무려 1000파운드짜리 구두 나무 골(shoe tree)도 있다. 과연 영국 찰스 왕이 신는 구두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면 한번 들를 가치는 있다.
록 앤드 코 해터스는 1676년 개업해서 현재도 같은 상점에서 영업하고 있는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모자 가게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이 생전에 단골이었고 찰스 3세 왕도 고객이다. 가게 안의 박물관에는 윈스턴 처칠 총리와 넬슨 제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모자 본도 있다. 모자 가격은 생각보다 고가는 아니다. 중절모는 87만원부터, 파나마 모자는 52만원부터 시작된다. 모자 하나로 왕족이 된 기분을 느끼는 사치를 한번 한다는 셈치고 카드를 긁을 만하지 않은가?
19번지에는 제임스 J 폭스라는 연초 가게가 있다. 시가를 주로 판매하는데 잎담배도 판다. 1787년에 개업해서 역시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가게이다. 영국에서 실내 담배를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윈스턴 처칠의 상징인 시가를 이 가게가 공급했다. 시가 한 개비에 10파운드(약 1만7500원)부터 4000파운드(약 700만원)까지 다양하다. 유명한 코히바 비히케 시가도 살 수 있다. 비히케 40개들이 한 상자 값은 무려 16만파운드(약 2억8000만원)다. 아파트 한 채 값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시가를 피는지 진짜 궁금하다.
트루피트 앤드 힐은 1805년에 개업을 했다. 기네스북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관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남편 필립 공이 고객이었다. 관례대로 따뜻한 물수건 면도와 이발, 그리고 신발까지 광을 내준다. 가격은 생각보다는 무척 싸다. 여왕 남편이 하던 이발과 세발까지 하는 제일 간단한 코스가 60파운드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225파운드(약 39만3750원)짜리 서비스는 좀 비싸긴 하다.
런던에 온 느낌 확 주는 아케이드 거리
한국에도 한때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아케이드라고 유행처럼 부르던 때가 있었다. 아마 노포들이 모여 있는 지붕 덮인 런던의 골목들을 보고 만든 이름일 터이다. 피카딜리 서커스로 가는 피카딜리길에는 3개의 아케이드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모습을 한 것이 벌링턴 아케이드다. 조그만 가게 40여개가 늘어선 179m 길이의 거리다. 1818년에 지어진 벌링턴 아케이드는 런던 고급 명품가인 올드본드 스트리트 바로 옆에 있다. 세계적 명품 거리인 올드본드 스트리트는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진도모피가 1980년대 중반에 유럽 제1호점을 내고 영업을 시작하던 곳이다. 당시 필자가 진도 현지 법인장이었음을 역사로라도 기록해야 할 듯하다. 샤넬, 구찌, 티파니 같은 세계 최고 명품들 사이에서 진도모피가 가게를 내고 영업을 했고 세계 유수의 항공사 잡지와 공항에 광고를 했다. 심지어는 한국 기업 누구도 영국 상업 TV에 광고를 안 할 때 진도모피는 한국 기업으로는 최초로 광고를 했다.
벌링던 아케이드 길 건너편에 피카딜리 아케이드(20개 가게)가 있고 그 옆에 프린스 아케이드가 있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영국 고유의 상품들을 파는 소규모 가게들이다. 유명 상표의 상품들을 파는 가게들은 거의 없다. 가게들의 모습과 아케이드 천장의 장식 등이 세월을 거슬러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오래된 영국 거리와 비슷한 모습이다.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천천히 걸으면서 상점들을 살펴보면 런던에 왔다는 느낌이 확 든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독자라면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로부터 ‘세비루 양복’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런던 중심에 있는 신사 정장 맞춤 양복의 성지 ‘세빌로’의 일본식 발음이다. 벌써 그때부터 멋쟁이 어른들이 수만리 밖 런던 세빌로 거리에서 양복을 맞추어 입었다는 뜻이다.
중산층의 꿈, 세빌로 양복점 거리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의 멋쟁이 남자들은 모두 세빌로에서 만든 양복을 입는다. 그래서 런던에 온 김에 이곳을 한번 들러볼 만하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여기서 양복을 맞추어 입는 객기를 부려도 될 만큼 성공을 해보자는 각오를 다질 겸 해서 말이다.
세빌로에 남성 맞춤 양복점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는 1803년경부터였다. 그러다가 지금도 남아 있는 양복점 헨리 풀 앤드 코가 1846년 영업을 시작했다. 이웃한 11번지의 헌트맨 양복점은 1849년에 영업을 시작한 뒤 현재 175년째 같은 장소에서 유명 인사들을 위해 양복을 만들고 있다. 헌트맨은 영화 ‘킹스맨’ 본부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양복점으로 위장한 정보본부 안으로 영국 정보부 스파이들인 킹스맨이 들어가는 장면을 바로 여기 헌트맨 맞춤 양복점에서 촬영했다. 1차대전 중 헌트맨은 신사양복은 물론 장교복도 만들었다.
세빌로에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는 1674년경이다. 이후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상점들이 본격적으로 맞춤 양복의 거리를 형성한 것은 1790년경부터였다. 이 거리를 거주지로 삼았던 유명인사들도 많다. 예를 들면 전 총리 윌리엄 피트,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쓴 작가 쥘 베른 등이 이곳 주민이었다. 이런 주민들과 이들을 찾아오는 귀족과 부자, 유명인사들을 상대로 한 고급 가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1870년부터 1912년 사이 1번지 거리에 왕립지리학회가 위치하면서 빅토리아 시절 왕성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탐험가들의 탐험 결과 귀국보고회가 이어져 거리가 영국 전역과 유럽에서 몰려든 호사가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세빌로 거리는 드디어 대단한 맞춤 양복 거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1968년 비틀스가 세운 애플레코드도 세빌로 3번지에 있었다. 1969년 1월 30일 애플레코드 본사 사무실 지붕에서 비틀스의 역사적인 마지막 라이브 공연이 열렸다. 당시 42분간의 공연은 결국 경찰이 와서 소리를 좀 줄여달라는 부탁으로 중단됐다. 점심 시간에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과 주변 사무실 사람들은 이 연주를 듣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 연주한 9곡 중에서 5곡이 신곡이었다. 당시 전 공연이 녹화되어 1970년 나온 기록영화 ‘렛잇비’에 사용되었다.
당시 애플은 지하에 녹음스튜디오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스튜디오에서 비틀스 최고의 걸작품인 ‘렛잇비’가 녹음되었다. 이 스튜디오에서는 1975년 5월 폐쇄할 때까지 애플레코드의 다른 아티스트들도 녹음을 했다.
세빌로에는 한창 전성기인 1950년대에는 40여개의 맞춤집이 있었으나 2006년 전 세계적으로 대량 생산된 풍성한 크기의 이탈리아, 프랑스의 고급 기성 양복이 유행하면서 19개로 줄었다. 그러다가 2014년경부터 몸 사이즈에 딱 맞추고 상의 길이는 짧고 소매는 좁은 세빌로 스타일 양복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다시 가게가 44개로 늘어났다.
세빌로는 지금도 모든 공정을 직접 손으로 하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직접 가게를 방문할 수 없는 고객들이 복지 견본을 요청하면 가게는 자신들이 가진 원단 중 고객이 원하는 재질, 색깔, 촉감 등에 맞추어 견본을 보낸다. 그러고는 기존 고객의 체중이 안 변했으면 자신들이 가진 옷본에 맞추어 고객이 선택한 옷감을 재단해서 재봉을 하는 1차 작업을 한다. 그걸 들고 양복점 재단사가 시골로 출장을 와서 고객 몸에 입혀 보고 품을 맞추는 가봉(假縫)을 한다. 그런 다음 다시 돌아와 거의 완성시킨 다음 다시 2차 가봉을 한다. 그리고 나서 고객과 재단사가 마음에 들면 최종 마감을 하고 다시 재단사가 출장을 가서 고객에게 옷을 입히고 끝을 낸다.
이런 과정은 최단 12주에서 최장 18주까지 걸리기에 옷 가격이 비싸다. 최소한 50시간을 들여야 제대로 된 맞춤양복 한 벌이 나온다. 특별하지 않은 옷감이라면 양복 상하 한 벌 가격이 약 3500~4000파운드(약 610만~700만원) 정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원단이다. 이런 양복점들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옷감을 구비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객들은 자신만의 특수한 옷감으로 옷을 맞춘다. 그래서인지 6000파운드(약 1050만원)부터 최고 1만파운드(약 1750만원)짜리 양복도 흔하다.
거의 대부분의 양복점이 가게 반지하와 2~3층의 작업장에서 제작을 한다. 재봉 전부를 손으로 한 땀 한 땀 한다. 수공 맞춤 제작이라는 영어 단어 ‘bespoke(비스포크)’는 영국 광고 기준청 규정에 의하면 고객 개개인의 신체를 반드시 손으로 잰 다음 옷본에 의해 재단된 옷감을 직접 재봉틀에서 손으로 봉제한 것을 뜻한다.
세빌로 비스포크 양복은 공기를 입은 듯 편하고 부드럽고 거의 착용감을 못 느낀다. 그래서 한 번 입으면 다른 양복은 입을 수가 없다. 이런 과정을 거치기에 지금도 노포 양복점에는 과거의 수많은 영국 유명인사들의 옷본이 존재하고 그걸 해당 노포는 자랑으로 삼는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헨리풀양복점은 윈스턴 처칠 총리의 단골 양복점이었음을 자랑한다. 처칠 총리의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 재무상이 아들의 손을 이끌고 와서 첫 양복 정장을 맞추어 준 후 평생 헨리풀에서 양복을 맞추었다. 나중에 체중이 늘어 옷을 만들기 어려워도 헨리풀은 그런 체형을 감출 수 있게 잘 제작해 처칠이 빚에 쪼들릴 때도 여기서 옷을 맞추어 입었다. 찰리 채플린, 호레이쇼 넬슨 제독, 나폴레옹 3세, 프랭크 시나트라, 톰 크루즈, 숀 코너리, 주드 로, 마이클 케인 등이 세빌로 가게들의 단골 고객들이었다. 영국에서 제작된 영국 영화 주인공들은 대부분 세빌로에서 제작된 양복을 입는 걸 자랑으로 삼는다. 그래서 영화의 크레디트에 반드시 명기한다.
이곳 맞춤양복점들은 자신들의 제품 광고에 ‘양복을 구입하는 게 아니라 투자(invest)한다’는 문구를 쓴다. 오랜 시간 이용하고 대를 물려 입는 양복이라는 뜻이다. 날이 갈수록 가격이 올라가는 샤넬 핸드백 같은 개념이다. 코로나 이후 세빌로 양복도 가격이 거의 배가 올랐다고 한다. 해서 영국인들이 양복 상의 팔꿈치에 가죽이나 다른 천을 덧대서 기워 입는 이유도 이런 곳에서 맞춘 고가의 양복이라 대를 이어서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지 결코 멋으로 덧감을 대는 것이 아니다.
영국 중산층 봉급쟁이들은 세빌로에서 별로 돈 생각 하지 않고 옷을 맞추었을 때 자신이 가장 성공했다고 느낀다. 세빌로에 와서 언젠가 돈 생각 하지 않고 양복을 맞출 꿈을 꾸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지금은 불가능할 듯한 꿈이라도 자꾸 꾸다 보면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