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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영국과 한국 보수당은 모두 지난 총선에서 참패했다. 양국 보수당은 새로운 당 대표 선출 등 당 재건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차이가 나서 한국 보수당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 바람에서 영국 보수당의 총선 참패 이후 움직임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전투구식 경선으로 자해를 하고 있는 한국 보수당과 달리 영국 보수당은 총선 참패 후 조용하게 반성문 쓰기에 골몰하고 있다. 텔레그래프, 데일리메일, 데일리익스프레스, 더스탠더드 같은 친보수 언론들도 이른바 ‘3W’를 찾는 작업에만 집중하고 있다. 3W는 ‘무엇이 잘못 되었나(What Went Wrong?)’를 뜻하는데 우선 쉽게 나온 결론이 ‘3B’이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와 브렉시트, 그리고 ‘Blob(블랍)’이라 칭해지는 나이젤 패라지 개혁당 당수가 총선 참패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Blob은 ‘목구멍에 걸려서 안 넘어가는 가시 같다’는 의미의 은유적 표현인데, 영국개혁당(Reform UK)의 실질 당수인 극우파 나이젤 패라지를 일컫는다. 영국개혁당이 몽니를 부린 나머지 우파 성향 표심이 갈려 보수당이 최소한 80석에서 많게는 200석까지 잃었다는 분석이고 보면 보수당 참패의 제1 원인은 개혁당이 분명하다.
이 3W라는 키워드에서 보듯 영국 보수 매체와 보수 진영은 궁극적으론 다시 정권을 찾아올 방법에 골몰하고 있다. 친보수당 언론들은 사설이나 기자 칼럼을 통해, 혹은 보수당 중진과 친보수당 인사들에게 논쟁의 장을 마련해 주면서 보수당 재건을 도와주고 있다. 보수당의 진지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건설적 제안을 실어주고 있는데 한국 국민의힘 대표 선출을 놓고 한국 보수 언론들이 이전투구를 즐기는 듯 나몰라라 하는 태도와는 비교된다.
 
 
 
“의원들끼리 교황 뽑듯 당수 뽑자”
 
영국 보수당 당수 경선에 나설 가능성이 점쳐지는 후보들의 태도는 놀라울 만큼 차분하다. 리시 수낵 내각의 절반인 12명의 중진들이 낙선을 해서 사실 당수 후보로 나올 의원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입후보를 선언해 기선을 잡을 만도 한데 정반대다. 주위에서 오고 가는 논쟁에 끼어들지 않고 발언을 자제한 채 사태가 돌아가는 것만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일지 모른다. 현재 보수당 전체가 누가 당수가 되느냐는 문제보다는 좌·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는 정책 문제와 ‘목에 가시’라는 나이젤 패라지 개혁당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진지한 논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당을 위한 충고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재 누구도 당수 후보로 나서는 의원이 없어 설만 난무한데도 당수 경선의 조기 과열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당을 걱정하는 인사들은 서둘러서 급하게 당수를 선출해서 저지른 실수(테리사 메이,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낵의 사례)를 다시 범하지 말자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면서 당수 경선에서 일반 당원들의 투표를 배제하고 의원들만으로 당수를 뽑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황 선출 방식을 택해 ‘내가 나서겠다’는 지도자보다는 능력 있는 지도자를 의원들이 발굴 추천해서 의원들만 투표하는 방식을 택하자는 제안이다. 일반 당원들의 인기에 영합한 인물이 세몰이로 당수로 뽑혀서는 안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보수당도 원내 의원들 투표만으로 당수를 뽑았었다. 그러다가 데이비드 캐머런 전 당수를 뽑을 때 일반 당원들도 참가하는 방식으로 룰이 변경되었는데 그런 룰을 이번에는 다시 바꿔보자는 것이다. 당 원로들은 “각자 집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복습한 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예습한 뒤에 집을 나서서 당수 경선을 시작하자”는 권고를 간절하게 하고 있다.
 
 
 
 
 
“생각 없고 멍청한 경선은 피해야 한다”
 
이러한 파격적 제안을 보수 언론들도 모두 진지하게 다루어 주고 있다. 한국의 보수 언론들이 국힘당 ‘읽씹(문자를 읽고 무시하는)’ 논쟁만을 지상 중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친보수 언론 텔레그래프는 이런 제안도 했다. ‘여름을 조용히 보내고, 신임 당수 선출을 위한 파티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그 파티를 분열이 아니라 통합을 위해 쓰자. 우리는 잠깐 멈춰서 숨을 쉬고, 정신을 좀 차린 다음, 다시 (보수당 재건을) 시작하자.’ 10월에 개최되는 전당대회 뒤에 당수 경선을 해도 늦지 않는다는 것으로 ‘생각 없이 순간적인 반응 같은 당수 선거(kneejerk leadership contest)’ 또는 ‘멍청한(idiotic) 경선’은 반드시 피하자는 권고다.
 
과거 보수당 재건의 상징이었던 캐머런 전 총리는 2005년 총선이 끝나고 7개월 뒤에 선출되었다. 2010년 5월 노동당 13년 천하를 끝내고 2024년 총선까지 무려 14년간의 장기 집권을 연 캐머런 전 총리도 사실 전당대회 전까지는 신인이었다. 하지만 원고도 없이 한 전당대회 연설이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버렸다. 언론들도 흡사 스타 탄생처럼 새로운 보수당 후보의 등장을 다루었다. 결국 그런 과정을 거쳐 당수 경선을 축제처럼 만들면서 보수당은 캐머런 당수 취임 5년 뒤 다시 정권을 빼앗아왔다. 텔레그래프는 캐머런 같은 인물의 재등장을 염두에 두면서 ‘그렇게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찾다 보면 산뜻한 젊은 피(bright young things)를 찾을 수도 있다’는 식의 제안을 하고 있다. 구렁텅이에 빠진 보수당을 구해줄 캐머런 같은 젊은 피의 메시아를 뽑자는 권유 겸 명령 같기도 하다.
캐머런은 당수가 되는 과정에서 4년 전 있었던 당수 선출 방식 변경의 득을 보았다. 그전까지는 하원의원 총회에서 의원들이 당수를 뽑았으나 보수당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당원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당시 경선에는 등록 당원 25만명 중 78%인 19만8000 여명이 참가해 캐머런이 13만4446표를 얻어 6만4398표에 그친 상대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겼다. 당시 캐머런은 44세의 3선 의원에 불과했는데 젊고 미남형의 신예 당수를 뽑는 전당대회는 흡사 종교집회를 방불케 했다. 당수 선출이라는 축제를 통해 13년간의 방황을 끝내고 재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만큼 당수 선출은 당의 재건과 향후 당의 운명을 가를 만큼 중요하다. 지금 국민의힘이 충분한 준비 없이 전형적인 냄비근성처럼 서둘러 대표 경선을 밀어붙이면서 문제를 오히려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영국 보수당과 보수 진영 내부에서는 참패의 요인이 3B라면 어떻게 해야 잃어버린 민심을 되찾을 수 있느냐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브렉시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고착된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전통적 우파 노선을 캐머런 식의 중원으로 끌고 나와서 중도 표심을 얻어야 한다는 의견과, 중도 표심도 같이 얻겠다고 진정한 보수 정신과 가치를 잃어버리면 개혁당을 좇아 산으로 간 집토끼 411만의 표심을 얻을 수 없으니 보수 색깔을 더욱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심지어 우파 지지자들은 대처리즘의 재발동(reheated Thatcherism)도 꺼내들고 있다. 대처리즘의 주요 철학인 작은 정부, 저율의 인플레이션, 자유시장을 선명하게 내걸어 개혁당으로 가버린 집토끼가 돌아오게 하자는 것이다. 두 논쟁이 현재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어 오는 10월 대개 3박4일 일정으로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치열하게 맞붙을 전망이다.
 
 
 
 
계속 우클릭? 좌클릭? 뜨거운 논쟁 중
 
영국 정당의 전당대회는 사전에 정해진 정책을 박수 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3박4일 정도 전국에서 온 당원들이 같이 자면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결론을 내는 자리다. 거기에서는 평의원과 평당원도 발언 기회가 똑같이 주어지고 그 덕분에 캐머런처럼 깜짝 스타가 발굴되기도 한다.
또 다른 정책 논쟁은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영국 개혁당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다. 여기에 대해서도 현재까지 나온 결론은 두 가지다. 개혁당이 이번 총선처럼 10% 이상의 보수표를 갖고 가면 보수당은 영원히 집권을 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끌어안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그렇게 해서는 극우파와는 같이 못 있겠다는 집토끼마저 잃어버려 더 밑바닥으도 갈 수 있다는 반박도 나온다. 어찌 되었건  보수당이 이번에 잃은 251석 중 거의 3분의2가 개혁당 때문에 잃었다는 분석이고 보면 개혁당을 어떻게 상대할 것이냐는 당의 사활이 걸린 사안이다. 개혁당이 없었거나 그들을 껴안았다면 보수당은 이번 총선에서 121석이 아니라 390석을 차지해 2019년 총선(365석)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한탄도 나온다. 전통적인 숨은 보수 혹은 소극적인 보수(shy tory)는 보수당의 인기 하락에도 불구하고 보수 신념을 안 바꾸고 단지 당 선택을 보수에서 개혁당으로 바꾸었다는 뜻이다. 실제 이번에 보수당이 얻은 681만표와 개혁당의 411만표를 합치면 노동당의 971만표와 120만표 이상 차이가 난다. 거기다가 개혁당이 2위를 한 지역구가 100개에 달하는 걸 보면 개혁당을 껴안으면 의외로 빨리 정권을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보수당 중진들과 원로들은 왜 정신승리에 도취해서 이번에 개혁당을 끌어안지 않고 끝까지 버텼는지 꾸짖는 분위기다. 내주지 않아도 될 정권을 노동당에 갖다 바친 수낵 전 총리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보수당이 2019년처럼 개혁당에 양보해서 협약을 맺었으면 실권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2019년 총선에서는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당시 브렉시트당 당수였던 나이젤 패라지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보수당이 브렉시트를 분명히 하면 브렉시트당은 317개 지역구에서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식의 거래를 한 것이다. 그 결과 보수당은 직전인 2017년 총선보다 48석을 더한 365석을 얻어 과반수(325석)에서 40석을 넘어서는 압승을 거뒀다.
 
다음번 2029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자존심을 꺾고 개혁당을 껴안는다면 총선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 때문에 보수당의 정책 노선 설정은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보리스 존슨과 테리사 메이 전 총리의 우향우에 실망해 노동당과 자민당으로 간 표와 보수답지 못한 보수당에 분노해 개혁당으로 간 표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수당이 우향우 노선을 유지한다 해도 무책임한 수준의 개혁당 공약에 현혹되어 넘어간 표는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현실적 분석이 지금으로선 더 우세하다. 그래서 차라리 노동당과 자민당으로 간 중도 표심과 기권을 한 표심을 얻기 위해 중간지점으로 약간 좌향좌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캐머런 전 총리가 내걸어서 노동당 정권 13년을 끝낸  일국 보수(One Nation Conservatism) 개념을 비롯해 큰 사회(Big Society) 정책, 진보 보수주의(Progressive conservatism), 온정 보수주의(Paternalistic conservatism), 붉은 보수주의(Red Tory), 노란색 사회주의(Yellow socialism),  사회주의 보수주의(Tory socialism), 작은 C 보수주의(small c Conservatism) 등 어지러울 정도로 비슷한 개념의 단어들이 난무하는 중이다. 심지어 연민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라는 미국 정치 용어까지 등장하는 판이다. 이번에 낙선한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보수당의 패배를 예상하고 재건을 위해 시작한 대중 보수주의(Popular Conservatism)와 우익자유주의(right-libertarianism)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중도 표심 노린 좌향좌 주장이 대세
 
벌써 지난 1월 보수당 한 중진 의원은 “보수당이 이번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일국 보수주의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패배를 예상한 보수당의 노선 논쟁은 총전 전부터 치열했다. 한국의 국민의힘이 현재 벌이는 부끄러운 대표 경선보다는 영국 보수당의 이런 노선 경쟁이 당의 재건을 위해서는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자신들이 지난 총선에서 영남을 제외한 전국 표심으로부터 왜 철저하게 버림받았는지에 대한 반성을 먼저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국정을 이어나갈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뒤 거기에 맞는 당 대표를 뽑는 것이 순서라는 얘기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총선 당일 바로 ‘보수는 재건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보수당은 데이비드 캐머런의 ‘습식 정책(political wet)’을 돌아봐야 한다고 권했다. 습식 정책은 마거릿 대처 정부 이후 보수당 내의 오랜 논쟁에 따른 분파 분류에서 비롯된 용어로 이름하여 습파(wets)와 건파(dries)로 나누는 식이다. 노조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마거릿 대처 총리 지지파를 건파, 반대파는 습파로 불렀다. 영어의 속어로 습하다(wet)는 ‘유약하다’, 그래서 ‘남자답지 못하다’는 나쁜 뜻으로 쓰인다. 대처 집권 당시 노동조합과 대화로 협상을 하자는 측을 대처 측은 습파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보수당 내에서는 이 용어들이 쓰인다. 예를 들면 공공지출이나 복지 예산 증액을 주장하는 측을 반대 측에서는 습파라고 빈정댄다.
어찌 되었건 이런 모든 논쟁은 보수당에 씌워진 계급 지향적이고, 권위적이고, 기득권만 인정하는 몰상식하고 냉정한 이미지를 벗어던지자는 몸부림이다. 철저하게 친자본주의적이고,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펴는 올드하고 수구적인 ‘악랄한 정당(Nasty Party)’의 이미지를 벗고 싶다는 발버둥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이미지는 한국의 보수당을 바라보는 40~50대의 시선과 비슷하다.
 
정치평론가들은 영국 보수당을 ‘극단의 유연성과 적응력이 뛰어난 기관(supremely flexible and adaptable institution)’이라고 칭찬한다. 사실 보수라는 단어는 어떤 면에서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과거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자는 고루한 단어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더러운 말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에서 보수는 우리 말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즉 ‘옛 것을 익히면 새 것을 알 수 있다’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대부분 받아들인다. 해서 걸핏하면 당명을 바꾸는 한국 보수당과는 달리 영국 보수당은 보수(Conservative)라는 당명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서 어떤 위기에서도 당명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실제 보수당은 1874년 벤저민 디즈레일리 정부로부터 시작해 2024년 총선까지 무려 98년간을 집권하고 20세기 들어서도 71년을 집권한 대단한 정당이다. 그 핵심 비결이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살아남기 위한 변신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 다.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바로바로 변신과 개혁을 해내는 유연성과 적응력,융통성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영국 보수당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자면 자칭 보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한국 보수당이 과연 진정한 보수이긴 한 건가 하는 의문이 자주 든다.
 
 
 
3박4일간의 전당대회에서 결론 낼 듯
 
물론 일부 정치 평론가들은 보수당을 ‘하도 많이 허용해서 지킬 것이 없어진’ 성공회 같은 정당이라고 빈정댄다. 이혼은 물론 사제의 결혼, 여성 사제와의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식이다 보니 성공회는 도대체 뭘 지키느냐는 비난을 받는다. 좋게 보면 영국 보수당은 성공회의 다른 별명인 ‘열린 교회(Broad church)’처럼 유연하고 수용적이라는 의미일텐데 그래서인지 최근 보수당 재건을 논하는 각종 논설에 ‘열린 교회’라는 단어도 자주 등장한다.
보수당의 정책 역사를 봐도 좌우를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완연하다. 마거릿 대처의 철저한 시장 불개입 원칙이 있었는가 하면 뒤를 이은 존 메이저 정부, 캐머런 정부는 거의 사회주의 정권의 정책을 방불케 하는 시장 개입, 국민 복지 확대, 기업 보조금 지불 등의 정책을 채택했다. 그래서 영국의 보수당 정권이나 노동당 정권이나 모두 자신의 색깔을 잃고 중간지대(central ground)에서 놀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드러내놓고 말은 않지만 보수당의 진정한 고민은 청년층과 중장년들의 좌경화 경향일지 모른다. ‘25세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가슴이 없고, 35살 이후에도 사회주의자이면 머리가 없는 것’이라는 명제가 외면당하는 현실이 진짜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도 한국과 비슷한 현상이다. 영국에서는 29살부터 45세까지의 연령층에서 노동당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2000년 이전에는 모든 연령층에 보수당 지지자가 골고루 퍼져 있었지만 이제 보수당은 노인들의 정당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가 되었다. 1990년만 해도 청년 지지자와 노년 지지자들 사이에 보수당 지지율이 10%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2020년대에 들어와서는 40%로 벌어졌다.
 
최근 런던 킹스칼리지 보고서는 MZ 세대들을 ‘역사에서 가장 많이 모든 걸 죽이는 세대(deadliest generation in history)’라고 지적했다. 결혼을 하지 않아 인구를 줄이고, 결혼 관련 산업과 가정 생활용품 산업을 죽이고, 동시에 올림픽에도 관심이 없고, 영국 특유의 마멀레이드잼도 안 먹는다는 식의 비판이다. 무엇보다 정치에서는 ‘나이 들면 누구나 보수가 되기 마련’이 라는 오랜 믿음마저 죽이는 첫 세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한 정당을 계속 지지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쉽게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순간적인 선택으로 투표를 한다.
동시에 청년 세대들은 각 정당의 전통적 정책에도 관심이 없다. 보수당은 저율의 세금을 걷고 복지도 줄여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친기업 정책을 펼치고, 노동당은 완전히 그 반대라는 전통적 관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복지와 세금이 반드시 반대 방향의 정책이라는 과거의 믿음도 신봉하지 않는다. 또 노동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중도좌파적인 정책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복지 혜택이 늘어나면 세금을 더 낼 각오를 하고 있다. 청년 세대들은 자신들의 직접 이익과 관련이 없는 문제로도 정당 지지를 바꾼다. 환경, 임신중절, 인종차별, 성취향, 소수성애자 관련 같은 문제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보수당이 이런 세대의 지지를 얻어 위해서는 차갑고 매서운 이미지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결국 영국과 한국의 표심은 거의 같은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당은 영국 보수당 같은 진지한 반성과 성찰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유치한 말싸움과 밥그릇 싸움이나 한다. 멀리서 보기에 진짜 안타깝다. 이번 총선 결과가 나온 후 친보수당 성향인 텔레그래프마저 현 보수당을 “아주 느리게 정면 충돌하는 자동차(slow-motion car crash) 같다”면서 “멸종되어가고 있는 수준(extinction level)”이라고까지 날카롭게 비웃었다. 그러나 그런 비웃음은 이제 사라졌다. 보수당이 상처를 핥으면서 와신상담하는 중인데 논의 방향이 상당히 고무적이라는 것이 지금 언론들의 칭찬이다. 한국의 보수당은 언제쯤 언론의 칭찬을 들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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