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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아,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이렇게 일갈했다. 이 구호를 앞세운 클린턴은 걸프전쟁을 승리로 끝낸 현직 대통령 조지 부시를 꺾고 대통령이 됐다. 이후 이 구호는 그 어떤 선거 캠페인 전략보다 강렬하게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다.
 
영국 보수당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끝난 2024년 영국 하원의원 총선을 보면서도 이 강렬한 구호가 다시 떠올랐 다. 다른 어떤 선거 전략이나 상황보다 이번 총선 승부를 결정지은 것이 지금의 영국 경제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노동당은 2010년 혜성같이 나타난 44세의 신예 데이비드 캐머런의 보수당에 잃어버렸던 정권을 무려 14년 만에 되찾아 왔다. 물론 이번 총선 승리는 18년 만에 418석을 차지하면서 정권교체를 이룩한 1997년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승리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보수당 의석 기준으로는 이번 승리가 노동당에는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둘 당시 보수당은 그나마 165석을 차지했지만 이번에는 기존 의석에서 무려 250석이나 감소한 121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한 영국 언론 표현에 따르면 노동당이 보수당을 완전히 ‘짓밟아버리는(trampled)’ 승리를 했으니 그동안 쌓인 분은 충분히 푼 셈이다. 
 
이번 총선이 왜 이런 결과로 끝났는지에 대한 논의는 뒤로하고 우선 표 분석부터 해보자. 사실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이 차지한 의석은 놀라울 정도다. 노동당은 33.7%의 득표율로 지난 2019년 총선 의석수보다 무려 211석이 증가한 412석을 차지했다.
이번 총선에서 가장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는 보수당을 망치기 위한 극우파 영국개혁당(Reform UK)의 몽니다. 이번 총선에서 개혁당의 목표는 자신의 후보 당선보다는 보수당 후보 낙선이었다. 집중적으로 보수당 후보를 잡을 지역구에만 전략 후보를 배치했다. 그런 전략이 먹혀 보수당 2등, 개혁당 3등을 차지한 곳이 수두룩하다. 이런 지역구에서는 노동당이나 자민당 후보들이 당선됐다. 보수당과 개혁당의 득표수를 합치면 당선된 노동당이나 자민당 후보 득표수를 훨씬 넘어서는 경우가 허다했다. 
 
친보수당 매체인 텔레그래프는 “이렇게 뺏긴 의석 수가 최소한 80석”이라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80석보다 더 많을 수 있다고도 평하고 있다. 보수당으로서는 땅을 칠 일이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우리 말이 생각나는 사례이다. 나도 못 먹지만 너도 못 먹게 하겠다는 개혁당의 심보가 통한 셈이다. 
 
덕분에 자민당은 어부지리를 챙겼다. 득표율이 12.2%로 개혁당의 득표율(14.3%)에도 못 미치지만 당선자는 72석으로 개혁당 5석의 14배도 넘는다. 유럽 유일의 한인촌인 뉴몰든이 포함된 킹스턴 지역구 하원의원이자 자민당 당수인 에드 데이비 의원은 자민당 역사상 최고의 성과를 내고 싱글벙글이다. 개혁당도 겨우 5명만 당선시켰지만 완전 축제 무드이다. 당 초유의 당선자 숫자일 뿐 아니라 실질 당수인 극우 정치인 나이젤 패라지 의원이 8수 끝에 드디어 웨스트민스터에 입성하게 됐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의 펍 농담거리에 불과했던 패라지 의원이 드디어 영국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 것에 만족하는 분위기다.
이런 개혁당의 몽니 말고 보수당의 진짜 참패 요인을  따져 보면 앞서 언급했듯이 결국 경제문제였다. 총선 전 유고브의 한 여론조사에서 ‘투표를 결정할 때 정당 정책 중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보는지’를 조사하자 ‘생활비 문제 60%, NHS 지원 45%, 이민자 문제 25%, 부담가능한 주택문제 19%, 기후변화와 환경문제 17%’라는 순으로 답이 돌아왔다. 유권자들이 어떤 거창한 정책보다 자신과 가족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한 영국 언론의 표현처럼 ‘일상의 문제(everyday matters)’에 관심이 무엇보다 집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400년 전인 1678년에 창설되었던 토리(Tory)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수당의 전체 역사를 보면 노동당에 져서 정권을 뺏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의 총선 패배는 과거의 패배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견해가 많다. 보수당으로서는 정당으로서의 존재가 멸종의 단계(extinction level)에 와 있다고 친보수당 언론인 텔레그래프가 보도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영국의 각종 언론과 정치평론가들이 보수당 참패 원인을 브렉시트, 당 내분, 직전 총리 보리스 존슨의 내로남불, 코로나 부실 대응 등을 들고 있지만 진짜 참패 원인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 있었다.
무엇보다 영국 유권자들은 보수당 정권 14년을 거치면서 ‘일상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못했다고 이미 총선 전부터 판단하고 있었다. 영국 경제가 거덜이 났고, 자신들의 삶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각박해졌다고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장바구니가 과거보다 가벼워졌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과연 영국이 세계 5위의 경제대국이 맞느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일상이 보수당 정권 14년 동안 망가졌다는 의미다. 리시 수낵 전 총리가 각종 경제지표가 그나마 좀 나아져서 조기 총선을 치르겠다고 결정했다고는 하지만 영국 유권자들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은 총선 당일 영국 중도좌파 언론 가디언이 기사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보여줬다. 이날 가디언은 ‘보수당 정권 14년 동안의 영국 변화’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영국이 처한 상황을 도표로 정리해서 간단하게 보여줬다. 투표장으로 향하는 유권자들에게 나름대로 조언을 한 셈인데, 이 기사가 5가지 요점으로 정리한 보수당 정권 14년 사이의 변화를 돌아보면 누구라도 보수당에 쉽게 표를 던지기 힘들었다. 가디언이 내건 5가지 변화 중 보수당에 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가디언은 보수당 집권 14년 동안 영국 경제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는 결론을 냈다. 가디언이 정리한 이 다섯 가지 일상의 문제는 한국의 보수당도 눈여겨봐야 할 사항이다.
 
➊ 주택을 구입, 소유하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가디언은 주택 소유는 과거에는 삶의 통과의례(rite of passage)였지만 현재 젊은 세대들에게는 ‘꿈(pipe dream)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했다. 과거 영국 젊은이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기숙사로 들어가거나 취직해 독립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연봉의 3배에 이르는 주택융자를 받으면 평생 갚아나가더라도 독신 청년 혼자서 살 수 있는 집을 구입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면 식구 수에 맞는 더 큰 집으로 옮겨가는 주택사다리(housing laddr)를 탈 수 있었다. 주택융자를 평생 착실하게 갚아나가 융자가 끝나면 은퇴해서 각종 연금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국 주택은 노후 보장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집값이 너무 올라 주택 구입을 꿈도 못 꾸게 되어버렸다.
실제 영국 평균 집값은 2010년 9만3046파운드에서 2024년 28만1000파운드로 무려 3배 이상 올랐다. 거기에 비해 봉급은 2010년 2만5967파운드에서 3만4963파운드로 34%밖에 안 올랐다. 월급 인상액에 비해 집값이 무려 10배가 뛰어버린 셈이다. 해서 젊은 부부가 연봉을 합쳐봐야 원룸도 사기 힘든 형편이 되어버렸다. 보수당 정권하에서 주택정책은 완전한 실패를 떠나 망책(亡策)이 되어버렸으니 비난의 화살이 14년을 집권한 보수당으로 돌아가는 건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하다. 결혼해서 주택 융자 갚으며 착실하게 은퇴를 기다리던 영국인들의 삶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제 젊은이들은 부모집을 떠나지 않고, 젊은 부부가 부모집에서 사는 일도 놀랍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빈집이나 건물에 무단거주(squats)하거나 호스텔, 민박집 또는 한 방에 수십 명이 거주하는 일도 흔하다. ‘감추어진 숙소(concealed housing)’라고 불리는 친구나 친척집의 거실 마룻바닥이나 소파에서 자는 영국인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처참한 상태의 사람들을 ‘숨겨진 노숙자(hidden homelessness)’라고 통칭해서 부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집이 없던 경우보다는 실업이나 투병 등으로 주택융자를 못 갚아 집을 뺏긴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현상은 코로나 기간 중에 심해졌는데 지금은 상황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
 
 
 
➋ 국가건강보험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하다.
 
영국의 국가건강보험(NHS)은 완전 무료이다. 공립 병원에는 본인부담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 어떤 병이든, 치료 기간이 얼마이든 무조건 무료다. 전 국민이 자신의 수입에서 2~8%의 개인분담금(NIC)을 내면 그걸로 완전 무료 혜택을 받는다. 이 분담금은 국가건강보험재단에 의해 운영된다.
그런데 이 수입에 비해 노령인구가 기하급수로 늘어나자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국가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며 무자비하게 NHS 관련 예산을 줄였다. 덕분에 NHS 재정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들이닥쳤다. 예컨대 현재 700만여명이 치료를 기다리고 있고, 간단한 건강문제로 가정의를 만나려면 최소 1주일은 기다려야 한다. 이런 현실을 보수당 14년은 그냥 경고만 내지르면서 허송세월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고 영국 국민들은 보고 있다. 특히 보수당 정권이 NHS를 망쳐놓은 데 대해 영국인들이 분노하고 있다.
50%가 넘는 영국인이 NHS를 가장 자랑스러운 영국의 재산이라고 본다. 32%가 영국 역사, 26%가 문화, 25%가 민주제도를 자랑으로 삼는 것보다 더 비율이 높다. 그러나 영국인들 70%가 10년 내에 NHS 제도가 어떻게든 변화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노동당 정부가 이 위기를 막아내고 의료보험제도를 살릴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이번 총선에서 대폭적인 지지를 했다.
 
 
 
➌ 브렉시트 이전보다 이민자가 훨씬 더 많아졌다.
 
보수당은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전통적으로 반(反)이민을 내건 정당이다.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데이비드 캐머런 정부는 물론 그 뒤의 테리사 메이 정권도 시종일관 이민자 숫자를 줄이겠다는 걸 주요 정책으로 강조해왔다. 심지어 이민정책부서인 내무부 장관이 TV에 나와 이민자를 전년도에 비해 얼마나 줄였는지를 대단한 업적이라고 자랑스럽게 발표하곤 했다.
하긴 영국인 유권자들이 그런 반이민 정서에 빠져 있으니 표를 좇는 정치인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약속과 현실이 정반대라는 것이 문제다. 지난 보수당 14년 동안 이민자들은 줄기는커녕 더 늘어났다. 가디언은 이를 보수당 정권의 패착이라고 국민들이 나무라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국민들의 반이민 정서가 EU에서 탈퇴하자는 브렉시트를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에서 통과되게 만들었다. 영국인들은 동유럽을 비롯한 EU 국가 국민들이 대거 들어와서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인식에서 브렉시트 찬성 투표를 했다. 하지만 이민자는 그 이후에도 줄지 않았다.
예컨대 공식 통계에서 이민자들은 2022년 76만4000여명(영국 전인구의 1.1%), 2023년 68만5000여명(영국 전 인구의 1%)으로 큰 변동이 없다. 영국 인구가 2021년 6727만명에서 2022년 6750만명으로 늘어난 걸로 보면 오히려 영국 인구 증가에 외국이민이 차지한 비중이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부부합계 출산율이 2010년 1.94명에서 2021년 1.61명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인구가 는다는 것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이민자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이민자들이 빼앗아가고, 이민자들 때문에 병원과 학교를 이용하기가 힘들어졌다고 본다. 그러면서 지난 14년간 이민자들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보수당 정권에 책임을 묻고 비난하고 있다. 보수당 정권은 프랑스와의 사이에 있는 도버해협으로 무작정 건너오는 불법이민자들을 아프리카 르완다에 돈을 주고 추방하려는 계획도 시도했으나 이민 정책 실패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➍ 범죄는 줄어들었지만 재판은 마냥 늦어지고 있다.
 
범죄는 14년 전에 비해 분명 줄어들어 길거리에 경찰을 더 늘린 보수당 정책이 성공하긴 했다. 하지만 가디언은 법원이 지난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처리하지 못한 재판이 밀려 현재 사상 최악의 재판 정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정부가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인데 법원 예산 삭감 등 엉뚱한 정책을 펼치며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재판을 기다리다 못해 결국 원고가 소송을 거두어들이는 일까지 많아질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➎ 무료급식 이용자가 늘었다.
 
생활비 증가로 인해 영국 인구 중 무려 3%인 203만여명이 현재 각종 무료급식제도(food bank)를 이용하고 있다. 2010년에는 0.1%도 되지 않던 숫자가 보수당 집권 14년 사이 무려 30배나 늘어난 것이다. 결국 집을 가지고 살면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난방비, 전기요금, 가스비용, 수도요금 같은 유지비는 물론 평범한 가족들의 식사비마저도 영국인들의 목을 견딜 수 없게 조르고 있다는 의미다. 4인 가족이 먹을 스파게티 요리에 10파운드(약 1만7500원) 정도가 드는데 이는 작년에 비해 무려 15%가 오른 금액이다. 2018년에 비하면 무려 20%가 오른 가격이다. 올리브오일은 5년 전에 비해 50%, 토마토 통조림은 45%, 스파게티 국수값은 39% 올랐으니 영국인들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고 결국 이는 보수당 정권에 화살을 돌리는 요인이 됐다.
가디언은 개학 시즌 자녀들의 교복과 필수 학용품을 사는 부모들은 가격표를 보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일부 교복 같은 품목은 코로나 전에 비해 50%나 올랐다. 무료급식제도를 이용하는 203만여명이 모두 영국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만큼의 인구가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가 과연 세계 경제 강국 5~6위권의 선진국이 맞느냐는 자학이 영국인들 사이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이런 가디언의 지적이 대부분 맞긴 하지만 보수당은 모든 문제를 보수당 탓으로만 돌리는 현실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인상 등 현재의 경제 난국을 불러온 치명적인 요인은 보수당의 통제 밖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국민들은 이런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영국 경제난에 대한 보수당의 책임은 면할 수 없다는 결론을 총선을 통해 내렸고, 14년을 집권한 보수당을 심판해버렸다. 모든 언론을 비롯한 정치평론가들은 적어도 앞으로 세 번의 총선에서 획기적인 방안을 보수당이 만들어내지 않는 한 정권을 찾아올 방법이 없다는 분석을 내리고 있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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