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작된 영광이 넘치는 시대
바야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장과 허구, 그리고 자극적인 조작이 범람하는 시대이다. 매일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사로잡는 수많은 정보 속에서 무엇이 변하지 않는 진짜 ‘팩트’인지 분별하는 일은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눈에 보이는 거대한 권력과 화려한 세상의 힘은 때때로 우리를 압도한다. 우리는 그 힘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해서 증언한다. 인간의 제국은 결국 쇠하고, 하나님의 보좌만이 영원하다.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아시리아의 왕실 부조는 이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한때 제국의 영광을 선전하던 그 부조는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진짜 영광으로 보고 있는가?”
2. 제국의 부조에 새겨진 권력의 선전
기원전 9세기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는 님루드 북서궁에 거대한 왕실 부조들을 세웠다. 그중 왕좌실 뒤편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성스러운 나무’ 장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권의 신성함과 제국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선전하는 정치적·종교적 이미지였다.
부조 중앙에는 성스러운 나무가 서 있고, 그 양쪽에는 왕의 모습이 대칭적으로 반복되어 있다. 왕은 의례복을 입고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을 들고 있으며, 주변에는 날개 달린 보호 영들이 서 있다. 그들은 솔방울 모양의 도구와 물통을 들고 있는데, 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세계에서 정화와 보호를 상징하는 의례적 이미지로 이해된다.
또한 날개 달린 원반 속 신적 존재는 아슈르 또는 샤마쉬(the god Ashur or Shamash)로 해석되기도 하며, 왕의 권위가 신적 승인 아래 있음을 보여 주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 모든 이미지는 방문자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주었다. “이 왕은 신들의 보호와 승인을 받은 제국 질서의 중심이다.”
3. 화려했지만 결국 퇴색한 돌
당시 이 부조는 오늘날처럼 회색 돌판만은 아니었다. 고대 아시리아 궁전 부조들은 본래 채색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 유물에는 색의 흔적도 남아 있다. 횃불과 궁전 조명 아래에서 채색된 부조와 왕좌는 당시 방문자들에게 압도적인 장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대부분의 색이 사라진 돌이다. 한때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제국의 빛은 퇴색했고, 그 권력의 언어는 박물관 벽에 붙은 고대의 유물이 되었다.
궁전 벽면의 쐐기문자 표준 명문은 왕의 칭호와 정복, 건축 업적을 선전했다. 또한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의 여러 왕실 전쟁 기록에는 적을 잔혹하게 징벌하고 도시를 파괴했다는 폭력의 언어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결국 제국의 영광은 아름다운 예술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두려움과 폭력의 질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부조에서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한 사람이지만 두 번 묘사된다. 이는 두 명의 왕을 그린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나무를 중심으로 왕의 권위를 대칭적으로 강조한 표현이다. 중앙의 성스러운 나무는 생명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그 위의 날개 달린 원반 속 신은 왕권이 신적 승인 아래 있음을 보여 준다. 왕의 양쪽에 선 보호적 존재들은 원뿔 모양 도구와 양동이의 액체로 왕을 정화하는 의례를 행한다. 결국 이 부조는 “왕좌 뒤의 권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제국의 선전 이미지이다. 왕은 강력한 군주로 보이지만, 동시에 신적 승인과 보호에 의존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의 하늘 보좌와 뚜렷한 대조가 드러난다.
4. 성경이 보여 주는 전혀 다른 보좌
이 장면 앞에서 우리는 요한계시록 4장과 5장, 그리고 다니엘서 7장에 나타나는 하늘 보좌를 떠올리게 된다. 성경은 고대 세계가 익숙하게 알던 왕궁과 보좌의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아시리아의 보좌가 왕의 권력을 과시하고 제국의 질서를 선전했다면, 성경의 하늘 보좌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다.
요한계시록 4장에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계신다. 그 보좌는 인간의 불안과 주술적 보호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앞에는 조작된 복종이 아니라, 거룩과 영광 앞에서 터져 나오는 참된 경배가 있다.
이십사 장로들은 자기들의 금 면류관을 보좌 앞에 내려놓으며 고백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요한계시록 4:11) 세상의 왕들은 면류관을 붙들기 위해 싸우지만, 하늘의 예배자들은 면류관을 내려놓음으로 참된 왕이 누구신지를 증언한다.
5. 폭력의 왕이 아니라 죽임 당하신 어린양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죽임 당하신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신다. 역사를 여는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한 분은 폭력으로 정복한 제국의 왕이 아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피 흘리신 어린양이다.
아시리아 왕실 명문이 정복과 공포의 언어를 새겼다면, 하늘 보좌 앞의 찬양은 구속과 은혜의 언어를 선포한다. 세상의 제국은 남의 피를 흘려 자기 영광을 세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피를 흘려 백성을 구원하셨다.
이것이 제국의 보좌와 하나님의 보좌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제국의 보좌는 사람을 굴복시킨다. 그러나 어린양의 보좌는 죄인을 살린다. 제국은 두려움으로 통치하지만, 그리스도는 은혜로 다스리신다.
6. 성도가 붙들어야 할 세 가지 진리
첫째, 세상의 과장된 힘에 속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 권력, 경제적 자본, 문화적 영향력은 지금 당장 거대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퇴색하는 부조와 같다. 시편 103편 19절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성도가 붙들어야 할 가장 확실한 팩트는 세상의 보좌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이다.
둘째, 두려움의 종교에서 은혜의 복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 종교는 종종 신을 달래고 조종하려는 거래로 변질된다. 그러나 복음은 거래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로 하늘 보좌 앞에 서는 것이 아니다.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셋째, 참된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우리의 면류관을 내려놓는 자리이다. 제국은 사람을 굴복시키지만, 복음은 사람을 경배자로 세운다.
7. 박물관의 돌과 하늘의 보좌 앞에서
수천 년 전 제국의 보좌는 사라졌고, 그 찬란했던 색은 희미해졌다. 그러나 하늘 보좌는 지금도 빛나고 있다. 세상의 허구와 조작된 힘이 우리를 흔들 때, 믿음의 눈을 들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바라보아야 한다.
퇴색한 제국의 부조는 우리에게 인간 영광의 끝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영원히 빛나는 하늘 보좌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완성을 보여 준다. 그것이 성도가 붙들어야 할 가장 확실한 진리이며, 역사의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을 궁극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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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전공수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