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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길고 긴 겨울을 보냈습니다. 겨울의 기간은 이론적으로 같을지라도 매년 겨울 길이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겨울마다 매번 느껴지지만 특별하게 지난겨울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길고 길었습니다. 겨울이 길었다는 것은 건너야 할 강이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강을 건너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강을 건너는 과정과 건넌 후에 깨달아지는 것은 강을 만나기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얻는 기회입니다.
 
어느 따스한 봄날에 온몸이 나른해지고 도심을 떠나 자연으로 달려가고 싶은 날입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근거리의 야산을 오르다 아름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노부부께서 작은 텃밭을 가꾸시는 모습입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노부부의 모습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합니다. 노부부는 밭을 일구시면서 힐끗 이방인을 쳐다보았습니다. 산자락을 오르는 사람이 등산복 차림이 아니어서인지 일손을 멈추고 쳐다보더니만 다시 밭을 일구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사진을 찍는다는 게 괜스레 죄를 짓는 듯 죄송한 생각이 듭니다. 이는 내 인생뿐 아니라 1888년 늦봄이자 초여름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역시 네덜란드의 어느 이름 모를 시골길을 걸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화가는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땀 흘려 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는 농부의 애절함이 그의 화폭에 담깁니다.
 
고흐는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37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동안 고흐는 동생 테오를 통해서 생활비를 지원받았습니다. 지금에야 반 고흐의 작품 한 점 가격은 최소 수백억 원대의 경매 가격이 붙지만, 고흐가 살아 있을 때는 그림 한 장 팔리지 않는 지극히 가난한 화가에 불과했습니다. 비교적 젊은 화가는 스케치할 수 있는 도구들을 둘러매고 자연 풍경을 따라 그림 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현대는 사진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서 좋은 풍경을 스케치하는 것보다는 사진으로 먼저 남긴 후 작업실에서 받은 감흥을 그림으로 옮길 수 있지만 고흐 당시만 해도 현장에서 스케치한 것을 토대로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고흐는 삶의 현실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생업을 위함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야 하는 절대적 사명감에서였습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면서 갖지 못한 결핍에 대해서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따스한 봄날에 농부는 땀 흘려 씨 뿌리는 것을 밭두렁에 앉아서 그의 움직임을 화폭에 담아내는 모습을 농부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을까? 밭을 일구는 모습은 내 인생의 아련한 추억의 아픔이 있습니다. 가난한 촌부의 부모님께서 손바닥보다는 몇 배 큰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십여 리를 걸어가 밭을 일구셨습니다. 그곳은 밭이 아니라 돌과 가시덤불로 우거진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일 년 내내 일구신 밭은 내 작은 걸음으로도 서너 발작 훌쩍 뛰면 끝이 닿는 작은 면적이었습니다. 새벽부터 어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즈음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습니다. 그렇게 일구신 밭, 어느 따스한 봄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밭에 갈 일이 있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손바닥 크기 몇 배의 작은 밭은 끝이 보이질 않을 만큼 농장으로 변모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밭을 일구는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경작입니다. 심전경작입니다. 곡식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은 밭을 갈아엎는 것입니다. 경작 없이 씨를 뿌리는 행위는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은 씨앗의 좋고 나쁨의 결과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좋은 밭이면 설령 좋은 씨앗이 아닐지라도 곡식은 잘 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씨앗일지라도 밭이 좋지 않은 밭에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자랄 수 없으며 최종적으로 열매를 맺힐 수 없게 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이 법칙은 불변합니다. 뿌리지 않고 열매를 거두고 싶은 마음은 욕심입니다. 뿌리지 않고 얻어진 열매를 먹은 것에 대해 토해내야 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씨를 뿌리기 위해선 선행해야 하는 것은 경작입니다. 반 고흐의 씨뿌리는 사람의 뒤편에는 희망의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가 뿌린 씨앗은 단순한 곡식이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할 인생의 다음 페이지입니다. 
 
지금은 비록 힘이 들지만 참고 인내하여 희망의 열매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숭고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씨는 봄에 뿌려야 합니다. 봄은 언제나 내 곁에 존재합니다. 마음의 밭을 경작하고 미래를 위해 오늘이라는 희생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지금 당장에 거둘 수 없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뿌린 씨에 대한 열매를 기쁨으로 거둘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박심원 목사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mail : seemwon@gmail.com

카톡아이디 : parkseem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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