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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얼마 전 영국에 잠깐 다녀간 이연주 판소리 명창에게서 평소 배우고 싶었던 판소리 개인교습을 받는 기회를 가졌다. 물론 수박 겉핥기 식의 교습이었지만 덕분에 우리 판소리 다섯 마당(춘향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중에서도 가장 쉽게 와닿는 춘향가의 사랑가, 흥보가의 놀부 심술 대목을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완전 걸음마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판소리가 입에 붙을 정도는 되는 일생일대의 값진 경험을 했다. 이를 통해 우리 한국 전통예술 장르인 판소리를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명창과의 대화 중 영국의 세계적인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영국인들은 ‘The Four Great Tragedies’라고 부른다) 중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를 판소리로 각색해 이미 공연을 해왔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특히 오는 10월 30~31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햄릿’을 판소리로 공연하는데, 이번 ‘햄릿’ 공연까지 하면 4대 비극을 완창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과문 탓에 몰랐을 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판소리나 창극으로 재현해 낸 공연이 이미 과거에도 수차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4대 비극을 모두 공연하는 것은 이연주 명창이 처음이라고 한다. 알면 보인다는 말처럼 국립창극단의 ‘리어왕’ 공연도 런던 시내 바비칸센터에서 10월 3~6일까지 4일에 걸쳐 열린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됐다.
 
이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동서양 수 만 리 밖의 두 이질문화가 서로의 벽을 넘어 과연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혼종예술이 될까. 인터넷에서 과거 공연들을 찾아보니 이 명인은 ‘맥베스’를 전형적인 우리 창 방식으로 소화했다. 무대도 원작처럼 스코틀랜드가 아닌 조선시대로 옮겨와 한국과 서양이 어우러진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냈다. 예술이란 형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음을 알고 무릎을 치게 되었다.
 
 
 
4대 비극 완창하는 이연주 명창 
 
이 명인은 ‘리어왕’ 공연에서는 혼자서 1시간8분을 판소리 완창으로 소화했다. 판소리 특유의 애조 섞인 목소리에 담긴 리어왕의 독백은 본래의 대사보다 더 절실하게 주인공의 비애를 나타내는 듯했다.
 
서양의 고전문학은 거의 전부 비극인 데 반해 우리 판소리는 모두 희극이다. 그것도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권선징악 작품들이 많다. 그걸 보면 한국인들은 서양인들에 비해 훨씬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면에 긍정적이라는 얘기다. 영국인들이 애지중지하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도 사실은 그리스 신화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중에도 생부를 살해하고 자신도 모르게 생모와 결혼하는 오이디푸스 신화가 셰익스피어 4대 비극과 가장 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 보면 서양인들의 사고 방식이 얼마나 우리와 다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두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4대 비극을 판소리로 재해석한 공연인 셈이다. 그런 노력이 가상하긴 하지만 동시에 눈물겹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국악인들의 노력에 비해 우리 국악이 받는 대접이 너무 소홀해서 하는 말이다.
완창에 무려 4시간이 걸리는 적벽가 판소리는 정말 사람이 할 노릇이 아니다. 과연 어느 서양 성악가가 오롯이 4시간을 혼자서 아리아로 소화할 수 있을까? 과연 이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판소리는 세계 어느 형태의 성악과도 비교가 안되는 자랑스러운 예술이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이면서도 대중들의 사랑을 아직도 제대로 못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판소리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재현해내는 시도를 알게 되면서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이 받는 대우와 판소리 등 우리 고유 전통 음악이 한국에서 받는 대우가 자연스럽게 비교됐다. 과연 우리가 우리 고유의 음악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지 심각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 한국의 대중음악과 영화 등 이른바 K-예술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소홀히 대접하고 외면하는 사이 판소리, 정가 같은 우리 전통 예술 음악이 세계인으로부터 먼저 인정받아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우리 판소리 다섯 마당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비교해 보면 공통점들이 적지 않다. 우선 판소리와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둘 다 구어체 대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민중들의 일상 정서를 표현하기에 더 이상 가는 예술 수단이 없다. 단지 판소리는 음악을 전달 매체로 삼았고,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대사를 이용해 대중과 소통한다. 이 점에서 많이 다를 듯한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연극을 목적으로 쓰인 구어 문학이다. 중세 희곡은 현대 희곡과는 달리 상황을 설명하는 지문(地文)이 전혀 없이 모두 말로 대사가 이뤄졌다. 그래서인지 공연 중 배우들의 대사를 들어 보면 단순한 말이 아니라 거의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음률이 높고 낮고 길고 짧아 음유시인들이 서정시를 낭독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다. 거의 성악에 가깝다는 느낌도 든다. 당연히 판소리와도 크게 차이가 안 난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영국 BBC방송 드라마 시리즈 ‘셜록’의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햄릿을 연기한 공연 3막4장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이해가 갈 듯하다. 남편이 죽은 지 한 달도 안 돼 시동생과 결혼한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하고 야단치면서 다그치는 장면을 보면 컴버배치가 얼마나 리드미컬하고 격정적으로 대사를 쏟아내는지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대사는 본래부터 리드미컬하게 대사를 읊조릴 수 있게 쓰여 있다. 그래서 관객들이 배우의 대사에 맞추어 몸짓을 하는 것을 공연 현장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러 오는 영국인들은 대부분 셰익스피어 연극 대사를 이미 숙지한 상태다. 우리도 판소리의 가사를 이미 익힌 후 듣는다면 판소리의 묘미와 맛을 충분히 알고 즐길 수 있을 터이다.
 
우리 판소리도 사실 따지고 보면 연극을 창으로 표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다른 형식의 연극인 셈이다. 서양 음악의 오페라와 같다고 봐도 된다. 그래서 대사가 노래처럼 음률이 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몸이 움직여지게 만든다. 그런 몸짓이 판소리를 들을 때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어깨장단 같은 것들이다. 이것이 셰익스피어 연극을 볼 때 영국인들이 느끼는 장단과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모두 서민들 희로애락 담은 구어 예술 
 
 
 
우리가 가장 흥을 느끼는 장단은 4·4조로 알려져 있다. 판소리 가사 모두가 4·4조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도 배우들의 대사가 같은 장단을 가지고 읊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햄릿의 3막4장에서 컴버배치는 어머니를 질타하는 대사를 억양과 음조를 다르게 하면서 흡사 기관총 소리같이 쏟아낸다. 이를 일러 영국인들은 ‘다 다 다 단 다(da da da dan da)’라고 표현한다. 대사를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처럼 읊어낸다고 해야 할 만큼 억양과 음조가 다양해서 관객들은 배우의 기세에 빨려들어가 몰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관객들을 빨아들이는 방식과 방법이 같다는 사실에서도 두 공연예술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영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셰익스피어가 갖는 비중과 판소리가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다르다. 영국 초·중·고등학교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은 누구나 반드시 배워야 하는 필수 과목이다. 영국의 모든 학교에서 셰익스피어를 공부한다. 한두 학기 동안 한두 작품을 전체 학년이 같이 공부하는 경우부터 한 작품을 더 깊게 공부하는 경우까지 어떤 형식으로든 셰익스피어는 영국 학생들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재정이 튼튼한 사립학교들은 학년마다 연극 담당 교사가 있어 학기 중 한 번은 학생들을 반드시 무대에 세운다. 이런 경우 거의 셰익스피어 연극을 공연한다. 그래서 고등교육을 받은 거의 모든 영국인들은 셰익스피어의 유명 작품 대사를 대부분 외운다. 사실 대사 전체를 알고 보는 연극과 대사를 전혀 모르고 보는 연극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영국인들이 수십 번도 더 봐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셰익스피어 연극 공연을 그래도 다시 찾는 이유는 그 유명한 대사들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배우들의 대사 치는 묘미를 더욱 즐길 수 있어서다.
 
만일 우리 판소리를 창본(唱本)을 앞에 놓고 한 소절 한 소절 짚어가면서 천천히 들은 다음 다시 감상하게 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그전에는 전혀 몰랐던 창극과 판소리의 진정한 가치와 재미를 즐기게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판소리의 가사는 잘 알 수 없는 한자 용어와 옛말들이 나와 사전에 숙지하지 않고는 절대 즐길 수 없다. 이는 셰익스피어 연극이나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대중가요나 영화는 사전에 공부를 하지 않아도 즐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서 대중 예술의 파급력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창과 셰익스피어 연극, 오페라는 사전 준비를 거쳐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결국 아는 만큼 들린다는 말이다.
 
학교에서 이미 셰익스피어를 공부한 영국인들은 연극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는 판소리를 즐길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학교에서든 사회 어디서든 그런 능력을 갖출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히 나와는 별 관계없는 옛날 전통 민요 같은 것으로만 판소리를 대한다. 굳이 판소리를 부를 수 있도록 음악 시간에 가르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판소리에 대한 기본 교육과 함께 판소리 다섯 마당의 창본을 학교에서 한 학기라도 배우고 익히면 어떨까? 그러면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 연극을 즐길 정도로 우리도 창극과 판소리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4대 비극만큼 대접 못 받는 우리의 판소리 
 
물론 셰익스피어가 영국인들에게 갖는 의미와 판소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분명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우리에게 판소리는 선택사항이지만 셰익스피어는 영국인에게 절대적인 필수다. 사실 영국인들에게 셰익스피어는 그냥 하나의 작가, 또는 대문호가 아니다. 오늘의 영어가 있게 한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이고 코미디언이자 대중 연예인이다. 그래서 오늘도 영어 속에 셰익스피어는 살아 있고 오늘도 영국 사회에서 대접을 받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처음 등장하는 영어 단어들을 조합해서 만든 조어를 보면 왜 영국인들에게 셰익스피어가 그렇게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또 영국 교육당국이 셰익스피어를 교과과정에 포함시켜 400년 전의 영어 작품을 학생들이 익히게 만드는 이유도 이해가 간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 36개와 154개의 단시(sonnets)에는 2만8829개의 단어가 사용되었다. 반면 현재 영어에는 6만여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비해 현대인은 두 배가 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2만5000개 정도의 단어면 거의 모든 영어 소통이 가능하긴 하다. 중요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그전까지는 한 번도 영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 단어가 무려 1700여개나 나온다는 사실이다. ‘햄릿’ 한 작품에서만도 600여개의 단어를 새로 선보였다. lonely(외로운), addiction(중독), critic(비평), eventful(다사다난한), eyeball(눈알), generous(관대한), majestic(위풍당당한), manager(책임자), extract(추출하다), excellent(훌륭한), assassination(암살), accommodation(숙소), amazement (경악), bloody(유혈의·빌어먹을), hurry(서둘러), road(길) 같은 오늘날 필수 단어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에 처음 등장한다. 만일 이런 단어들이 현재의 영어에 없었다면 일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싶다.
 
영국인들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조합한 어구들과 관용어, 문장들도 셰익스피어 작품에 처음 등장해서 오늘날 영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All the world’s
a stage’(세상은 하나의 무대이다), ‘Brave new world’(멋진 신세계), ‘It’s Greek to me’(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Wild-goose chase’ (이룰 수 없는 일을 어리석게 추진하는 일) 등이 대표적이다. 또 ‘Break the ice’(말문을 트게 하다),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반짝이는 것이라고 모두가 금이 아니다)처럼 영국인들이 수도 없이 쓰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또 ‘끝이 좋으면 다 좋다’(All’s well that ends well·동명의 희곡에 나오는 문구), ‘세상 방방곡곡에서’(All corners of the world·‘심벨린’의 문구), ‘어차피 올 것은 온다’(Come what come may·‘맥베스’의 문구), ‘내 마음을 솔직히 말하면’(I will wear my heart upon my sleeve·‘오셀로’의 문구), ‘사랑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The course of true love never did run smooth)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처음 선보인 문구들은 이제 거의 격언처럼 들린다.
셰익스피어는 ‘un’이라는 접두사를 붙여 반대의 뜻을 가진 단어를 만드는 기법도 고안해 냈다. unaware(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uncomfortable(불편하게), undress(탈의), unearthly(기이한), unreal(현실이 아닌 듯한) 같은 단어들이 그런 단어들이다.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단어 두 개를 엮어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낸 것도 셰익스피어다. ‘Sorry sight’(슬픈 광경), ‘sweet sorrow’(달콤한 슬픔), ‘All of sudden’(청천벽력같이·갑자기), ‘Fair play’(공정한 행위), ‘High time’(적절한 때), ‘lie low’(숨죽여 있기·시간을 기다리다) 같은 것들이다.
 
이렇게 한 명의 작가가 사후 400년 뒤에도 영국인 전체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영국인들로서는 행운이다. 물론 우리들의 판소리도 그런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고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셰익스피어만큼 영향을 끼친 대문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예술이 이제 세계인들로부터 대접을 받기 시작한 만큼 머지않아 세계인들의 관심이 대중예술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의 전통예술로 향할 것이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의 장단이 깃든 판소리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제안을 감히 해본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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