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씨앗이 땅에 떨어집니다. 씨앗은 떨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뿌리를 내립니다. 싹을 틔운 나무 역시 심어진 장소를 탓하지 않습니다. 홀로 벼랑에 심어졌을지라도 그곳을 최고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뿌리를 내리고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게 됩니다. 거센 비바람에 넘어져 뿌리가 뽑힐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남은 뿌리를 더 깊게 내려 새로운 싹을 틔워 생명을 유지합니다.
노량진 고시생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창이 없는 비좁은 고시원에서 내일을 위해 오늘의 삶을 포기한 채 공부에만 매진한다 했습니다. 주인공은 노량진을 일컬어 외롭고 고독한 도심 속의 섬이라 표현했습니다. 내일에 주어질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오늘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유보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끝없는 터널 자체였습니다. 일 년이면 끝이 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렇게 십 오 년을 고시원에 갇혀 생활하게 되었다 했습니다.
어떤 이는 삼십 년이 넘도록 고시원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갇혀 산다 했습니다. 노량진 고시촌을 일컬어 도심 속의 외로운 섬이라 표현하는 이도 있지만, 그곳에서 행복의 씨앗을 심고 가꾸는 희망의 청년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어디에 살아야 행복한 장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행복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고시 공부 그 자체가 행복일 순 없을까? 자신이 정한 목적을 향해 스스로 비좁은 골방에 가두는 것은 행복이어야 합니다. 행복한 맘으로 고시 공부를 하면 내일에 주어질 미지의 세계도 행복으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결국엔 미래에 도착할 그곳에도 행복할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정의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정상의 삶에서 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상을 향해 오르는 과정도 행복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정상은 다를 수 있습니다. 괄목할 만한 어떤 결과에 도달했을 때에만 행복을 거머쥘 수 있다면 인간은 행복의 노예일 뿐입니다. 생각했던 정상에 오르는 모든 과정이 행복해야 정상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불행하고 내일 정상에선 행복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과 떼어낼 수 없는 인격 공동체입니다. 행복의 정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어진 모든 상황이 행복 그 자체입니다. 행복은 외부의 어떤 조건이 아니라 삶 자체가 행복으로 버무려져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는 소위 대기업에 입사한 이들도 행복해하지 않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정상인데 그곳은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은 잔인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힘들게 들어간 대학, 대기업이나 기업, 그곳은 녹녹한 곳이 아닙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의 실력을 숫자로 표출해내야 하는 살벌한 곳이기 때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과 기업에 입사했을지라도 쉼을 가져올 수 없기에 행복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기준을 바꿔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든 생각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생각을 바꾸지 않고는 어떠한 삶의 만족도 얻어낼 수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의 행복 기준은 매스컴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말하는 것이 기준 됩니다. 인생은 결코 영화처럼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성이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 합니다. 남성의 모델은 전통으로 내려오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보다는 개방적이고 열려 있고 삶의 환경이 나아졌기에 당연히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그 자체이기에 행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입니다. 그러나 함께 사는 여성의 행복 기준은 드라마나 영화 매스컴이 모델입니다. 잘생긴 배우들의 행동과 품위 있고 세련된 삶을 행복으로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함께 사는 부부가 행복의 기준이 다르니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의 기준이 없어 통계조차 낼 수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인터뷰한다면 그들은 모두 행복하다고 답을 할 것입니다.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편리한 문명과 화려한 문화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체로 받아들입니다. 타고난 운명으로 여기는 숙명과는 좀 다른 차원으로서의 행복입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마실 수돗물조차 없어서 멀고 먼길을 오가며 물을 길어 와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들의 삶 자체에 대해 만족하며 감사한 삶을 살게 됩니다.
행복의 시제는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입니다. 오늘 행복해야 미래도 행복합니다. 오늘 행복함이 행복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불행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면 내일에 객관적인 행복한 일상이 주어질지라도 그것을 행복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것을 내일로 미루는 습관이 관습화되어 있습니다. 좋은 옷은 잘 보관해 둡니다. 좋은 그릇도 장롱 위에 보관해 둡니다. 어느 어르신 집을 방문했는데 딸을 위해 준비해 놓은 이불과 그릇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딸은 이미 시집을 갖는데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변천으로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르신만 모르고 계셨습니다.
행복은 경치 좋은 곳에서 맛난 음식을 먹으며 유희낙락 즐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인생의 일부이기에 행복이 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목숨 걸고 공부하고 주어진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며 직장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행복이 행복을 낳습니다. 세상은 창조법칙으로 순환됩니다. 심음과 거둠의 법칙입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 심은 것을 거두게 됩니다. 불행이 행복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행복이 불행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행복은 행복의 씨앗에서만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삶을 고통이라 여긴다면 결코 내일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행복의 열매를 얻을 수 없게 됩니다.
박심원 목사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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