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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판 위에 되살아난 기원전 701년의 전쟁
대영박물관 10b 전시실의 거대한 석판 부조 앞에 서면, 기원전 701년 고대 근동을 뒤흔들었던 한 전쟁의 현장이 눈앞에 되살아난다. 앗시리아 제국의 산헤립 왕이 유다 왕국을 침공했을 때 벌어진 ‘라기스 공성전(Siege of Lachish)’ 부조이다. 
이 유물은 단순한 고대 전쟁 장면이 아니다. 성경의 기록, 앗시리아 왕실의 기록, 그리고 고고학적 유물이 서로 만나며 역사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열왕기하 18장과 이사야 36장은 산헤립이 유다의 여러 견고한 성읍들을 공격하여 점령했다고 기록한다. 그 가운데 라기스는 단순한 지방 성읍이 아니었다. 라기스는 예루살렘을 지키는 남방의 핵심 요새였고, 유다 왕국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성경은 라기스의 함락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지만, 대영박물관의 라기스 부조는 그 짧은 성경 기록 뒤에 감추어진 전쟁의 참혹함을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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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부조는 앗시리아의 전술과 무기의 디테일을 잘 보여준다. 경사로와 공성퇴: 앗시리아 군대는 거대한 인공 경사로를 구축한 뒤, 바퀴 달린 장갑 무기인 공성퇴를 성벽으로 밀어 올리며 맹렬히 진격한다. ● 치열한 방어와 구호: 성벽 위 유다 방어군은 공성퇴를 태우려고 불타는 횃불을 던지며, 앗시리아군은 이에 맞서 거대한 국자로 물을 부어 불을 끈다. ● 구릉 지대 묘사: 배경의 독특한 물고기 비늘 모양 패턴은 유다 지역의 험준한 산악 지형을 사실적으로 나타낸다. ● 체계적인 군대 분업: 최전선의 공성퇴를 엄호하기 위해 궁수와 투석병, 방패병 등 다양한 병과가 조직적인 협동 전술을 펼치고 있다.]

 
 
 
1. 라기스 함락, 성경과 고고학이 만나는 자리
부조 속 앗시리아 군대는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거대한 토성 경사로를 쌓고, 그 위로 바퀴 달린 공성퇴를 밀어 올린다. 병사들은 방패와 무기를 들고 질서정연하게 전진하며, 성을 향해 압도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반면 유다의 수비대는 성벽 위에서 돌과 횃불을 던지며 끝까지 저항한다. 그들의 몸짓에는 절망과 결사항전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 조직과 공성 기술을 가진 앗시리아 군대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라기스는 함락되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가족과 가재도구를 챙긴 채 포로 행렬에 끌려간다. 어떤 사람들은 수레에 짐을 싣고, 어떤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고향을 떠난다. 
부조에 새겨진 유다인들의 머리 모양, 수염, 복식은 고대 유다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 주는 귀중한 시각 자료이다. 성경이 “산헤립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였다”고 압축해서 말한 사건이, 이 돌판 위에서는 피와 눈물의 장면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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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헤립 왕의 보좌: 우측 중앙의 화려한 왕좌에 앉은 인물이 산헤립 왕이다. 왕의 머리 위 설형문자 비문에는 "세상의 왕 산헤립이 보좌에 앉아 라기스의 전리품을 검열했다"라는 승전 서사가 새겨져 있다. ● 유다 포로들의 항복: 좌측에서 앗시리아 지휘관들의 인도에 따라 끌려온 라기스의 유다 주민들이 왕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바닥에 완전히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이 장면은 예루살렘 정복 실패라는 전략적 오점을 덮고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라기스에서의 전과를 극대화한 앗시리아 프로파간다(정치적 선전, 선동)정수를 보여준다.]

 

 
 
2. 승전 기록 속에 감추어진 정치적 의도인 프로파간다(Propaganda)
그러나 이 부조를 단순히 “앗시리아의 위대한 승리”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라기스 부조는 역사 자료인 동시에 고대 제국의 정치적 선전물, 곧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부조의 종결부에서 산헤립은 화려한 보좌에 앉아 포로와 전리품을 검열한다. 설형문자 기록은 그를 “세상의 왕, 앗시리아의 왕”으로 높이며, 라기스의 전리품을 살펴보는 장면을 장엄하게 묘사한다. 이 장면 전체는 왕의 권력과 제국의 압도적 힘을 극적으로 과시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고대 제국의 왕궁 벽면에 새겨진 부조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을 찾아온 외국 사절, 신하, 군 지휘관들에게 제국의 위엄을 각인시키는 정치적 무대였다. 그러므로 라기스 부조는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왕이 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게 만들고 싶었는가”를 보여 준다. 이것이 이 부조를 읽을 때 반드시 프로파간다(선전, 선동)의 장막을 걷어 내야 하는 이유이다.
 
3. 라기스는 말하지만, 예루살렘은 침묵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부조가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말하지 않는 것이다. 산헤립의 궁극적 목표는 라기스 하나가 아니었다. 산헤립의 최종 목표는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굴복시키고, 히스기야 왕의 항전을 끝장내는 것이었다. 
앗시리아 기록은 히스기야가 금과 은과 여러 보물을 조공으로 바쳤다고 자랑한다. 성경도 히스기야가 성전과 왕궁의 은을 내어 주고, 성전 문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 산헤립에게 바쳤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라기스 공성전’이 말하지 않는 놀라운 것은 앗시리아 기록이 예루살렘 함락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산헤립의 기록은 히스기야를 “새장 속의 새처럼” 예루살렘에 가두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했다거나 히스기야를 사로잡았다는 기록은 남기지 못한다. 
고대 제국의 왕들이 자기 패배나 실패를 기록에서 감추는 일이 흔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침묵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성경은 예루살렘을 겹겹이 포위했던 앗시리아의 대군이 하룻밤 사이에 기적적인 재앙을 맞이하여 18만 5천 명의 군사를 잃고, 산헤립 왕이 황급히 수도 니느웨로 철군했다고 생생하게 증언한다. 
역사적으로 그 밤에 일어난 모든 정황을 완전히 복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루살렘이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4. 실패를 가리는 화려한 승리의 장면
그렇다면 산헤립은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라기스의 승리를 궁전 벽면에 그토록 크게 새겼을까? 라기스는 실제로 함락된 도시였고, 앗시리아가 거둔 분명한 군사적 승리였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라기스는 더 크게 부각될 필요가 있었다. 예루살렘을 끝내 점령하지 못한 원정의 아쉬움을 덮기 위해, 산헤립은 라기스 함락이라는 부분적 승리를 제국의 위대한 승전 서사로 확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정치적 실패를 다른 화려한 장면으로 가리는 일종의 '스핀 닥터(Spin Doctor)'의 여론 조작 전술과 완벽하게 궤를 같이한다. 권력자는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장면을 확대하고, 불리한 장면은 축소하거나 침묵한다. 
라기스 부조 속 앗시리아 군대는 강하고 질서정연하며, 유다 포로들은 무력하고 비참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그 장엄한 승전 이미지 뒤에는 정복되지 않은 예루살렘이라는 불편한 사실이 남아 있다. 그래서 라기스 부조는 승리의 기념비인 동시에 실패를 가리는 장막이기도 하다.
 
결론: 화려한 서사 너머의 진실을 읽는 힘
라기스 부조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쳐 준다. 하나는 성경 속 유다 왕국의 역사가 실제 고대 근동의 국제 정세 속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허공에 떠 있는 신화가 아니라, 제국과 전쟁과 외교와 조공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한다. 
다른 하나는 권력이 언제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승자의 기록은 빛나는 언어와 장엄한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나 침묵, 과장, 선택적 강조를 함께 읽을 때 비로소 역사의 더 깊은 층이 드러난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와 뉴스, 선전과 해석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고대 제국의 부조와 현대 미디어는 시대는 다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론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러므로 라기스 부조 앞에서 우리는 오래된 돌판만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권력이 역사를 어떻게 편집하는지, 그리고 믿음의 눈이 어떻게 그 장막 너머의 진실을 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대영박물관의 라기스 공성전 부조는 성경 속 유다 왕국의 역사적 실재를 고고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팩트'의 보고 중 하나이다. 동시에 권력의 유지를 위해 역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재포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생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화려하게 조각된 석판의 외형적 연출에 압도당하지 않고, 서로 다른 두 진영의 기록을 냉철하게 대조하고 교차 검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수천 년의 두터운 세월을 뚫고 살아 숨 쉬는 진짜 역사적 진실과 대면할 수 있게 된다.
 
■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글쓴이 전공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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