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합니다. 행복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대중 매체들을 통해 무겁게 다가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행복이라는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의 형태가 마치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형이하학적 존재의 물질로 둔갑하게 됩니다.
형이상학은 존재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하는데 사용하는 철학적 논제라면 형이하학은 존재가 보이는 물질세계를 일컫습니다. 세계의 철학 중심 사상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같은 철인의 존재를 뛰어넘을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개념은 모두 형이상학적 주제로 설명을 했습니다.
행복 역시 형이상학적인 주제일 뿐입니다. 손에 잡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행복을 정의 내릴 수 없기에 존재하는 것 같으나 현실 세계에 물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행복하냐고 묻고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하니 행복을 찾아 떠나야 하는 행복 난민 시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행복 난민 시대입니다. 난민이라는 것은 자신의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계획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행위를 흔히 이민이라 합니다. 이민의 특징은 철저한 계획성이 있습니다. 그냥 짐을 싸서 이민을 떠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최대한의 정보를 얻어야 하고, 가야 할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지식과 공부를 하고 그 나라에 정착할 수 있는 조건과 내가 가지고 있는 여건이 적합한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떠나게 됩니다.
이민의 중요한 과제는 지금 이곳보다 가고 싶은 그곳이 더 행복하고 의미 있으며 삶의 질이 더 높아질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인생의 더 큰 발전을 위해서 이민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난민은 그럴 수 없습니다. 정든 나라와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은 이민과 같을 수 있으나 의미는 상의하게 다릅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환경에 처해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다른 나라로의 이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난민이란 피난 가듯 계획 없이 무작정 지금 있는 나라를 떠나야 합니다. 야밤에 도주하듯 그렇게 정든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계획을 세울 수 없는 무한의 세계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이 난민입니다. 요르단에 살면서 난민들과 마음과 마음, 영혼과 영혼이 맞닿는 생활을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향인 시리아와 이라크, 예멘을 떠나서 유리 방황하는 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왔지만 갈 곳은 그들 스스로 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렇게 희생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행복의 열매가 가득할 것이라 막연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열에 일곱은 행복은커녕 죽지 못해 산다는 고백들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인 OECD 38개(2022년 기준) 가입국 중에서 하위에 속합니다.
대한민국은 모든 부문에서는 선두 그룹에 속하지만, 인간의 삶의 가치를 묻는 말에는 하위에 속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제, 문화, 예술, 종교 부분은 자타공인 상위그룹이지만 국민의 행복지수는 하위에 머문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의 내면의 삶의 모습과 양극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겉 다르고 속이 다른 삶을 살아야 할까? 이러한 양극화 된 상황에 대해 ‘조승우’ 님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손쉽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틱톡 등 수많은 SNS를 이용하면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의 인생을 말 그대로 직관하고 있다. 그런 화려한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면서 동경하고 부러워하며 현재의 내 삶에 대해 불평불만을 갖고 자존감을 계속 낮추다 결국 불행해지고 마는 것이다.”(조승우/나를 살리는 습관 죽이는 습관 p5/ RHK 2024)
인간의 삶은 상대적으로 평가받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이유는 인간은 지극히 상대적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을 깊이 있게 볼 수 있다면 비교를 통하여 쉼 없는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장점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상대적 비교가 내면적 영향을 주기보다는 외적인 것을 모방하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비교는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서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입니다.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나라를 떠나는 난민들의 모습과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겨집니다. 행복 난민이라는 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송수천년종시후”(松樹千年終是朽) 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나무도 천년 뒤에는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행복은 어느 순간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먼 훗날에 찾아오는 낯선 손님도 아닙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행복은 얼굴빛을 달리할 때가 있습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소나무도 천년 뒤에는 죽는다는 말은 이 땅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옛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입니다. 모든 상황과 모든 환경 속에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입니다.
박심원 목사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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