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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56
가스전/ 사전트
Gassed/ John Singer Sagent

 


눈먼 자들의 동아줄


전쟁은 이긴 자에게나 진 자에게나 슬픔과 상처와 환멸을 주고 지나간다. 인류 역사의 지독한 수치심을 주도한 전쟁이라는 괴물은 세상을 통제하기 위한 인간들의 여물지 못한 충성심의 표현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만들어내었던 수많은 인류의 전쟁으로부터 인간들은 주눅들고 고개 숙이고 굴복해야 하였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정확한 병명을 보류한 일종의 정신병에 해당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시시하게 끝나버린 오늘날에도 그 대립의 흔적을 고스란히 떠안고 신음하는 지정학적 성감대가 안타깝지만 우리의 한반도다. 연평도 사건으로 우울해진 마음으로 전쟁의 어이없음을 확인해보려 한다면, 런던의 아주 훌륭한 전쟁박물관 하나를 권하고 싶다.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이다. 두 차례 세계전쟁의 전승주역이었던 영국의 전쟁박물관이니 빛나는 승리의 행가레가 넘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영국을 너무도 무시하는 셈이다. 이 박물관을 한 바퀴 돌아 보고 나면, 전쟁의 승리보다 더 통쾌한 것이 전쟁방지라는 반전주의 같은 것이 생긴다. 당신의 머리에 떠오른 그 반전 이데올로기는 묘한 자부심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지구를 지키려는 독수리오형제 같은 마음을 품고서야 당신은 황혼녁의 박물관을 나설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뜻밖에 대단한 명화 몇 점을 덤으로 얻어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 중의 한 점이 오늘 소개하는 무시무시한 화가 사전트(1856~1925)의 무시무시한 그림 ‘가스전(1919)’이다.

 

미국인 사전트가 무시무시한 화가인 것은 ‘마담 X (1884)’를 비롯한 그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필력에서 비롯된다. 인상파의 물결 위에서도 리얼리즘을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우상 벨라스케스 못지 않은 당당함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채화를 포함하면 무려 수천 점의 그림을 남긴 그의 정열적 다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인상파의 시대에 태어난 것이 어쩌면 비극이었을, 괴물 같은 화가가 사전트다. 그가 종군화가로 참전해 그린 이 ‘가스전’이 무시무시한 그림인 것은 첫째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서 비롯된다. 무려 6미터가 넘는 폭을 자랑하는 대작이다. 그리고 나머지 이유들은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휩싸는 전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세계 일차대전시 독일군의 무자비한 가스공격 후의 모습이다. 1915년 독일군은 벨기에의 전장에 최초로 독가스를 살포하였다. 그 유명한 겨자가스(Mustard gas) 공격이었다. 겨자가스는 노출된 피부를 태워버리고 심지어 장기까지 태워버리는, 당시로서는 가공할 신무기였다. 방독면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강력한 화생방전이었던 셈이다. 당시 최고의 화가로 이름을 떨치던 사전트는 이미 62세의 노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윈덤 루이스, 스텐리 스펜서, 폴 내쉬 같은 영국화가들을 이끌고 종군화가로 참전하여 전쟁의 비극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그가 보았던 것은 전쟁의 처참한 모습이었으며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인간,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온통 노란 세상, 가스탄의 폐허 속에서 아홉 명의 부상병들이 줄을 서서 이동하고 있다. 눈에 붕대를 감은 그들은 앞을 볼 수가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들은 앞사람에 의지하며 이동하고 있는데, 위생병 두 명의 인도를 받고 있다. 그들의 손에는 아직 버릴 수 없는 살상 무기인 무거운 총들이 들려져 있으며, 고통 속에서도 몇몇은 힘겹게 철모를 들고 있다. 암흑 속의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아마도 넘쳐나는 부상병들로 아수라장일 야전병동일 것이다. 그들은 상태가 양호한 행운아들이다. 잡초처럼 쓰러진 수많은 병사들은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도축장의 가축들처럼 널브러져 있다. 그들의 희망은 과연 다시 앞을 보게 될까. 거장 피터브뤼겔의 명화 ‘맹인을 인도하는 맹인(The Blind Leading the Blind(1568)’을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브뤼겔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태복음 15장 14절)’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둡게 형상화시킨 것은, 암담한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희망을 잃지 말자는 일종의 밝은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커다란 그림 속에서 섬세한 필치로 사전트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결코 그렇게 속 깊은 구구한 해석까지도 필요 없는 것이다. 그저 전장터의 처참한 현실을 가능한 커다랗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눈 먼 병사들의 처참한 죽음과 처참한 생으로의 귀환행렬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공포나, 분노 같은 짧은 단어 하나면 족한 것이다.

 

몇몇 눈 먼 자들이 일으키는 전쟁을 통해 이 세상의 많은 선량한 인간들이 진짜 눈을 잃고 진짜 목숨을 잃어야 한다. 자신의 의지를 박탈당한 인간의 포즈보다 불행한 자세가 또 있을까. 화폭의 오른쪽에 친절한 사전트가 생생히 그려 넣은 밧줄들은 무엇을 의미해야 옳을까. 야전병동 천막의 느슨한 밧줄일까. 눈먼 인간들이 반드시 잡고 지켜내야 할 평화와 사랑의 동아줄일까. 전쟁종식, 평화적으로 한반도가 통일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늘까지 연결되는 단단한 동아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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