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나는 런던-70
진흙 목욕/ 데이빗 봄버그
The Mud Bath/ David Bomberg
소용돌이치는 욕망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문명의 진행을 도전과 응전이라는 인식으로 명징하게 풀어낸바 있다. 창조적 소수에 의해 인류 문명이 진보된다는 그의 상큼 발랄한 시각을 서양 미술사에 적용시켜 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다. 몇몇 천재적인 광기를 지녔던 화가들이 제시한 도전의식에 인류미술이 고민하고 응전하면서 서양미술사는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광범위하게 인식되어온 ‘모더니즘’이라는 예술용 영어 단어는 도전과 응전의 사이쯤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예술사조가 그렇듯이 ‘모더니즘’이 떠올리는 미학적 이미지도 역시 반항이며 도전이다. 그러나 특별히 사실적이었던 십 구세기 예술에 대한 급격한 반동을 의미하는 모더니즘은, 이십 세기를 맞이하게 되는 지구의 통통 튀는 예술운동의 특징들을 집약하는 개념적 경계를 지니고 있어서, 응전의 시각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획일적인 세계관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 수 없다는 각성 아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여러 형태의 예술관이 지구를 휩쓰는데, 그런 여러 가지 경향들의 특징이 어우러진 것이 모더니즘의 탄생설화다. 예컨대 독일의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이나 이태리의 미래주의, 혹은 19세기서부터 이어져 온 프랑스의 상징주의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폭넓은 미적 범위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용어다.
영국 모더니즘의 시조 격인 굵고 짧았던 유파가 ‘소용돌이파(Vorticism)’다. 화가이자 작가였던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와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등에 의해 제작되는 ‘돌풍(BLAST, 1914~15))’이라는 문학잡지를 통해 소용돌이파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이름 ‘소용돌이’는 파운드가 만든 것으로, 잡지 ‘돌풍’의 부제에서 차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동하는 새 시대의 예술혼을 상징하는 힘찬 용어가 ‘소용돌이’였던 셈이다. 미술에 있어서의 그들은 ‘입체주의(Cubism)’와 ‘미래주의(Futurism)’를 섞어 놓은듯한 양상을 보여 주었다. 세잔의 권면과 충고를 이어받은 피카소와 블라크의 입체주의처럼 다중시점이나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보여주었으며, 이태리 화가들의 미래주의처럼 대상의 움직임과 속도감에 열렬히 주목하였다.
자신은 소용돌이 이론을 심히 불신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소용돌이파의 대표적 그림으로 평가 받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데이빗 봄버그(1890~1957)다. 봄버그는 폴란드계 유태인의 후손으로 버밍햄에서 자라나고 런던에서 활동한 화가이며, ‘화이트체플아이들(Whitechapel Boys)’ ?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런던의 유태계 예술가들을 그렇게 불렀다. 유태인들의 집성촌이 화이트채플이었기 때문이다. ? 로 분류되는 예술가다.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 완성에 집착하였으므로 소용돌이파에 전적으로 투신하지 않았던 화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몇몇 초기작은 심하게 소용돌이파의 이론에 부합된다. 그 대표적 작품이 이 ‘진흙목욕(1914)’이다. 테이트 재단 소장품으로 테이트모던에서 만날 수 있다.
유태인들이 만든 화이트채플의 어느 대중 목욕탕의 장면으로 추정되고 있는 그림이다. 목욕탕 안의 많은 사람들의 벌거벗은 동작을 보여주고 있다. 탕 속의 물을 붉은 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타이틀이 ‘진흙목욕’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색감이다. 정열을 의미하는 것일까? 목욕탕의 모든 벌거벗은 사람들의 동작은 물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물을 향해 뛰어들고 물을 온몸에 적시고 물 속에 푹 빠진다. 물을 향한 인간들의 피 끓는 정열. 당시 지구는 인간들의 타락한 정열로 얼룩진 세계전쟁 중이었다. 깨끗해져야 할 인간들이 진흙탕 위에서 피를 흘리며 뒹굴고 있는 중이었다.
흰색과 청색의, 기하학적으로 표현된 인체들은 갖가지 동작을 보여주고 있다. 추상적인 그 동작들은 깨끗함을 추구하는 목욕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구체화되고 있다. 세례라는 종교적 행위를 연상시키며 그 동작들은 소용돌이치고 있다. 물을 향한 인간들의 역동성. 그 역동의 중심추처럼 목욕탕의 기둥은 솟아 오르고 있다. 기둥을 중심으로 인간들은 소용돌이치며 무언가를 애타게 갈구하고 있다. 봄버그는 옷을 벗은 인체의 간절함을 묘사하는 대신 그 간절함의 굴절되고 왜곡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습들을 처음 보았을 때 우리는 목욕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화가의 설명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지만, 바라 볼수록 인간의 집단 목욕이라는 행위에 나타나는 애타는 간절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화가가 맞추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과녁의 면적이 아니라 과녁의 이면에 존재하는 과녁의 재질이었던 것이다. 과녁의 색과 형태가 아니라 우리가 맞추어야 하는 표적의 진정한 재질과 목표의식이었던 것이다.
대중목욕탕은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해온 곳이다. 똑같이 벌거벗은 몸뚱이로 우르르 모여서 함께 몸을 닦는 엄숙하고 익살맞은 대중탕의 모습은 한국인 누구에게나 각인된 비밀스러운 동질성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아우성치는 세상의 간절함, 이 아름다운 소용돌이 앞에 서면 갑자기 물이 그리워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