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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세상은 살기도 어렵지만 죽기도 어렵다. 얼마 전 뇌종양에 시달리던 70대 아내에게 농약을 먹여 살해한 남편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기사에 달린 댓글 대개가 남편의 선택을 이해하면서 동정을 표했다. 이제 우리도 노령인구 1000만명 시대에 들어선 초고령사회가 되었다. 노인이 노인을 구완하는 노노간병(老老看病), 치매 노인을 보살피다가 온 가족이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경우도 흔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영국 하원을 통과한 ‘조력사(assisted dying) 법’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조력사(助力死)는 문자 그대로 누군가의 힘을 빌려 자살하는 제도이다.
 
 
 
찬성 330, 반대 275로 하원 통과
 
조력사법이 필요한지 여부는 아주 오랫동안 영국 사회의 논쟁거리였다. 2015년에는 하원에서 330 대 118로 부결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난 11월 29일 영국 하원에서 ‘불치병 성인 임종 중환자 법(Terminally Adults End of Life Bill)’이 찬성 330표, 반대 275표로 통과되면서 본격적인 법 제정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번에 2차 독회를 거쳐 본회의 통과가 이뤄지긴 했지만 이 법은 앞으로 해당 분과위원회, 3차 독회, 상원 부의, 국왕 재가 등등의 잡다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일단 가장 큰 고비는 넘겨 법으로 제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노동당 하원의원 김 레드베터의 ‘평의원 법안(PMB·Private Members Bill)’ 형식으로 제출된 이 법안은 이번에 하원에서 5시간 논쟁 뒤 통과되었다. 각 당은 이 법안 표결 전 당 차원의 지침을 주지 않고 의원 각자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투표하도록 했다. 이유는 이번 법이 영국 사회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는 조력사법을 1967년의 임신 중절허용법과 사형폐지법(1998년), 동성애 비범죄화법(1967년), 동성 결혼 허용법(2013년) 통과에 비유한다.
 
투표 이후 대다수 하원의원들은 자신의 의원 경력 중 이번 법안 투표가 가장 어려웠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하원의원 개개인의 평소 사상과 신념, 종교, 경험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완전 자유투표여서 결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법 통과 후 의료계 출신 의원 7명은 법안에 찬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으로는 마지막 임종 단계에서 환자가 겪는 고통은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이유나 인류애적인 이유로 조력사를 반대한다면 정말 가소로운 일”이라고까지 했다. 표결의 결과를 알리는 기사에서 법안 제안자인 레드베터 의원도 이 법안의 목적에 대해 “끔찍한 죽음을 피할 수 있는(could prevent harrowing deaths) 법”이라고 공감력 있는 표현을 썼다.
 
지난 11월 29일 의원들의 본회의 투표가 있기 1주일 전인 11월 22일 발표된 유고브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3%가 조력사의 원칙에 찬성하고 단 13%만이 반대한다고 나왔다. 전직 총리들의 의견도 갈라졌다. 노동당 소속 전 총리 고든 브라운은 스코틀랜드 신부 아들답게 법안에 반대했다. 전 총리 리즈 트러스, 보리스 존슨, 테리사 메이도 반대를 했다. 반면 리시 수낵과 2015년에 반대한 데이비드 캐머런은 찬성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하원의원이 아니기에 투표 숫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만약 법안이 상원에 오게 되면 상원의원인 메이와 캐머런 전 총리는 투표를 할 수 있다.
 
현 내각에서도 의견은 갈렸다. 키어 스타머 총리, 에드 밀리밴드 에너지안보·넷제로부 장관, 리즈 켄달 노동·연금 장관 등은 법안에 찬성했다. 하지만 웨스 스트링 보건부 장관은 법안에 반대했다. 그는 “조력사가 합법화되기 전에 완화치료가 완벽해져야 하는데 영국의 완화치료가 아직 수준 미달”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완화치료(palliative care)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다른 NHS(국민보건서비스) 서비스를 줄여야 하는데 그럴 수도 없다는 설명을 했다. 야당인 보수당 당수 케미 베이드녹은 법안에 반대했다.
 
 
 
 
 
“허용 안 하는 건 국가의 횡포이자 고문”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법안에 찬성한 의원들이 상당히 많았다. 한 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모가 암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고 마지막 2주간은 정말 끔찍했다고 고백했다. 순전히 수액으로만 버틸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고통이 본인은 물론 지켜보는 가족도 정말 못할 짓이었다고 했다. 그는 “왜 도대체 인간을 그런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지 모르겠다” “누구도 그런 경험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이는 분명 법과 국가의 횡포이자 고문”이라고 분노했다.
 
그동안 영국 언론에는 조력사법 필요의 근거가 되는 사례들이 많이 보도되어 왔다. 지난 2000년 한 어머니는 아들의 자살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2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심한 마약중독으로 간헐적 정신착란과 고통을 받던 아들이 결국 42세 생일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면서 자살을 시도했다. 당시 63살이던 어머니는 아들의 자살 시도를 지켜보다가 앰뷸런스를 부른 뒤 아들이 고통을 호소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베개로 머리를 덮어 자살을 도와주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아들의 사망에 전혀 영향을 못 끼쳤다는 검시 결과가 나와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그 이후 그녀는 조력사 운동을 열렬히 펼쳤다.
 
한 어머니가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유전병인 헌팅턴병에 신음하다가 자식들에게도 안 알리고 혼자 자살을 한 사건도 있었다. 자식에게 알리면 자살방조라는 피해를 줄까 싶어 거짓말을 하고 혼자 외롭게 죽었다고 아들은 한탄했다. 33살인 아들도 어머니와 같은 유전병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어머니의 언니도 같은 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떴다. 당연히 아들은 조력사법의 강력한 후원자다.
 
반면 조력사를 반대하는 경우도 많다. 레트증후군이라는 희귀한 신경발달장애 유전병을 앓는 8살 아이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군가 이번 조력사법에 의해 아이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다. 조력사법으로 인해 의도치 않은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브라운 전 총리는 가디언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자신이 이 법안에 반대하는 이유를 자세하고 솔직하게 밝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는 자식을 잃은 경험에 비춰 “제대로 된 최선의 노력을 하는 마지막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도 잘 안다”고 썼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면 얼마나 한이 되는지 자신은 직접 겪어서 안다는 말이다. 특히 그는 조력사에 선행되어야 할 완화치료가 완벽하게 갖추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조력사 논의가 온갖 선의로 시작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열정적인 노력을 그들을 고통 없이 일찍 죽게 만드는 데 쏟을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조력생존(assisted living)에 더 많은 자원과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그들을 한번 잃고 나면 다시 회복할 수 없기(irreplaceable) 때문이다.”
 
찬반 양쪽 모두 지금보다 나은 완화치료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반면 조력사의 실행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법이 제정되어 조력사가 실행된다고 해도 과연 현재의 영국 의료시스템 안에서 순조롭게 이루어질지 의문이라는 시선도 많다. 결국 의료진이 실무적으로 조력사를 도와야 하는데 그런 극단적인 의료 행위를 하도록 훈련받은 인원도 없고, 있다고 해도 나서서 실행하려는 의료진이 있겠느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새 법이 영국 NHS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6개월 내 사망’ 판단할 의사 있을까?
 
무엇보다 조력사법이 정하는 조건들이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이번 조력사법에는 다음과 같은 단서 조항들이 있다. 
 
△18세 이상 성인으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주민이며, 가정의에게 등록한 지 12개월이 지나야 한다. 
 
△결정을 할 수 있는 온전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고, 명확하고 확실한 의사가 압력이나 강압이 아닌 자신의 희망이어야 한다. 
 
△향후 6개월 내에 사망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환자 자신이 죽기를 원하는 2건의 자필 서류가 있어야 하고, 그 서류에는 증인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 
 
△2명의 자격 있는 의사가 최소한 1주일의 간격을 두고 각각 승인해야 한다.
 
△의사 승인 후 고등법원 판사가 결정을 한 뒤 14일이 지나야 조치가 취해 질 수 있다. 
 
△의사가 적절한 약품을 준비해 주고 환자 본인이 직접 행동을 해야 한다.(다만 어떤 약품을 사용해야 하는지는 법이 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까다로운 규정을 정해놓은 이유는 법이 오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그 규정이 실무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의료계에서 나온다. 일단 환자가 6개월 내에 사망할 것이라는 판단을 의사들이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6개월 내에 사망한다고 결정하는 일은 환자를 도우는 결정이긴 하지만 일종의 사형선고라 선뜻 결정하기가 주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력사를 반대하는 측에서 가장 염려하는 점은 ‘중병으로 약해진 환자들이 주위의 무언의 압력을 의식해서 반강제로 조력사를 선택할 가능성’이다. 조력사법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선의에서 시작된 법이다. 하지만 일단 물꼬를 트고 나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공익적인 면에서 가족과 사회에 부담이 되는 중환자들에게는 조력사가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영국 가톨릭 수장 웨스트민스터 추기경은 심각하게 경고했다. 지금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간이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게 되고 그걸 사회가 드러내 놓고 법으로 인정하고 지원한다면 과연 미래에 이 법이 어떤 파장을 낳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추기경의 걱정은 1997년부터 조력사를 합법화해 온 미국 오리건주의 지난 27년간 통계를 보면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리건주에서 그동안 조력사를 택한 4274명 중 82%가 65세 이상이었는데 66%가 암환자, 신경계 중병환자 11%, 심장계열 환자 10% 등이었다. 결국 노령의 중병환자들이 주로 선택했다는 의미다. 또 조력사의 이유로는 ‘자신이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해서’가 91.6%, ‘인간적인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어서’가 63%, ‘신체를 자신이 가누지 못한다’가 46.6%, ‘가족과 친지에게 신세를 지는 부담감’이 43.3%, ‘통증이 너무 심해서’가 34.3%, ‘질환 관련 경비부담’이 8.2% 등(중복 답변 허용)이었다. 이를 보면 조력사가 중환자들에게 은근한 압력으로 작용했음이 충분히 이해된다. 조력사를 택해서 의사가 필요한 약품을 주었음에도 결국 3분의1이 사용하지 않았다는 통계도 있다.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어 고통 속에서도 생명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일단 시행되면 무언의 압력 될 수 있다’
 
조력사법이 존재하게 되면 고통받는 중환자는 홉슨의 선택(Hobson’s choice)이라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반대 이유로 내거는 사람들도 있다. 얼핏 보면 선택이 조력사와 완화치료 두 개 같지만 결국 하나의 선택밖에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력사법 제정 전에는 조력사라는 선택이 없었으니 의료진이나 가족, 사회 모두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조력사법이 생기면 6개월 더 살아 봐야 별 의미가 없으니 하루라도 일찍 끝내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앞설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중환자가 주위 시선이 그럴 것이라고 오해한다면 결국 무언의 조력사 압력이 될 것이라는 우려다.
 
조력사법 반대 측에서는 ‘미끄러운 내리막길 현상(Slippery Slope Effect)’이 나타날 것이라는 걱정도 한다. 일단 법이 시행되고 나면 처음의 엄격한 제한 조건이 완화되기 마련이어서 조력사 허용 대상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오리건주에서는 주민으로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는 당초 조건이 없어져서 이제 외부에서 와도 조력사를 할 수 있게 했다. 캐나다에서도 처음에는 임종단계의 환자에게만 허용을 했는데 나중에는 심한 통증을 겪는 불치병과 불구 환자, 회복이 불가능한 정신질환 환자에게도 허락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캐나다의 사망자 중 4%, 오리건주 사망자의 1%가 조력사로 인한 사망이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영국의 경우는 일단 임종 단계의 환자만 대상이라고는 하지만 조력사를 이미 시행한 유럽 6개국도 캐나다의 경우를 따라 이미 대상을 넓혔다.
 
영국에서는 벌써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사고능력이 멀쩡해도 신체가 마비되어 눈 말고는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환자가 조력사망을 원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벌써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런 환자의 결정도 존중해야 하느냐는 논제를 놓고 다른 차원의 법 제정에 대한 논의가 이미 일고 있다. 2012년 록트인증후군(locked-in syndrome)에 걸려 목 아래는 전신마비 상태가 된 전직 럭비 선수는 눈 깜박임만으로 소통하면서 자신의 삶이 지옥이라고 했다. 해서 자살을 막는 영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으나 결국 고등법원에서 패소하고 고통 속에 2년을 더 살아야 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어가느냐 마느냐는 인간 존엄의 문제로 절대적인 개인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왜 국가와 법이 결정하느냐는 질문을 하면서 죽어갔다.
 
스위스 조력사 지원단체인 디그니타스의료원을 지난 20년간 영국인 500명이 이용했다는 통계가 있다. 한국인도 10여명이 이곳을 이용했고, 약 500명의 한국인 대기자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 조력사는 점점 법제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스페인, 오스트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조력사를 합법화했다. 미국에서는 워싱턴 DC, 오리건주 등 50개 주 중 10개 주가 합법화하고 있다.
 
영국은 조력사의 가장 큰 전제조건인 완화치료와 호스피스 서비스 시설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갖추어져 있다. 2022~2023년의 경우 고통에 시달리던 불치병 임종 환자 30만명과 그들의 6만 가정이 도움을 받았다. 더군다나 영국에서는 이런 보살핌에 개인 부담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조력사법 시행을 앞두고 완화치료 시설의 보완에 대한 요구가 높다. 반면 한국의 경우는 노인 자살률이 세계 1위이다. 거기에 더해 간병인 비용과 치료비 부담이 환자 가족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차라리 한국이 조력사 논의를 영국보다 더 빨리, 진지하게 시작할 나라가 아닌가 싶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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