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순국선열 殉國先烈과 호국영령 護國英靈 이란 말을 한다. 둘 다 훌륭하신 분들을 지칭하지만 구분하자면 순국선열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빼앗긴 후 해방될 때까지 자발적으로 투쟁을 벌이다 돌아가신 분들로 즉 독립운동가들이다. 호국영령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장에 나가 전사한 분들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국가 기념일이다. 11월 17일인데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다. 을사조약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지정한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에 영국에서 최초의 순국선열이 나왔는데 바로 대한제국 주영공사관의 대리공사 이한응 열사다. 이한응 공사의 순국일은 5월 12일이다. 그는 국권이 상실되는 을사늑약의 비극을 미리 알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영국과 일본의 2차 영일동맹에 관한 비밀 협약의 초안이 1905년 5월 10일 영국 외무부에 전달됐다는데 이 내용을 알게 된 후 좌절해 5월 12일 공사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최초의 순국이다.
열사가 순국한 당시 주영공사관 건물은 지금 아파트로 사용하고 있다. 얼스코트 트레보버 로드 Earls Court Trebovir Rd 4번지. 외관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나 그곳이 대한민국의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라고 알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는 이도 적다. 당연히 찾는 이도 없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많은 대통령이 런던에 왔지만 이곳을 찾은 대통령은 없었다. 외면 받는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라고 할까.
왜냐하면 유럽(네덜란드)에 있는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과는 대우에 온도 차가 있기 때문이다. 이준 열사 기념관은 고종황제의 밀사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열사가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907년 7월 14일 병사한 곳을 기념하여 지은 기념관이다. 물론 숭고한 뜻을 살리고자 어느 독지가가 사비로 열사가 묵었던 호텔을 사들여 기념관을 개관(1995년)했지만, 이곳은 두고두고 독립운동 유적지로 사랑받고 있으면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 고위공직자들이 반드시 들리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그에 비하면 이한응 열사는 재영한인(교민)들의 순수한 열정에 기대어 그나마 그 정신을 되살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재영한인들은 이한응 열사의 동상을 만들어 기리자는 논의를 1980년대 말부터 했다. '이한응 공사 추모사업추진회'를 결성해 열사의 생전 활동과 순국을 알리고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했다. 주낙군, 채우병, 고 장민웅 씨 등 한인사회의 원로들이 동분서주해서 제작한 열사의 동상이 지금 대사관 입구에 모셔져 있다. 1993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을 겸해 제막식을 했다.
5월 12일, 아무도 아는 이 없겠지만 이날은 이한응 공사의 순국일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최초의 순국이 지금 거의 잊힌다고 해도 영국에 사는 우리는 그래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대사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인들의 정성으로 마련한 열사의 동상이 있다. 열사의 뜻을 살리고 전하려 했던 한인사회 어른들의 노력을 우리는 그래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헤럴드 김 종백
런던 코리아타운의 마지막 신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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