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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세계 인구의 5분의 1, 지구 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하면서 세상 어디에나 식민지를 뒀던 ‘해가 지지 않는 제국(Never Sun set Empire)’. 위세가 대단했던 만큼 영국 역사에는 이른바 흑역사(Dark History)도 참 많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의 대표적 흑역사가 바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무역이다. ‘흑인 노예’ 하면 미국이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노예무역의 주인공은 영국이다. 어찌 보면 미국은 단지 노예 소비자였을 뿐인데 지금 그 대가를 영국보다 더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않았던 영국의 노예무역 원죄가 최근 들어 조명받는 분위기다.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서 비롯된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는 세계적인 인권운동으로 인해 대영제국의 노예무역 흑역사를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자성이 영국 안에서도 일기 시작했다.
   
사실 흑인 노예무역은 영국이 아니라 아프리카와 가깝던 포르투갈이 1400년대 중반부터 제일 먼저 시작했다. 그러다가 영국이 미국을 식민지로 두게 된 1500년대부터 농업 개발을 위해 노예무역을 급작스럽게 늘리기 시작하면서 영국이 노예무역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영국 노예선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미국을 비롯한 서인도제도와 브라질 등 남미로 실어 나르면서, 대서양을 중심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신대륙을 연결하는 300년간 이어진 노예 수송 삼각무역(Trialngle Trade)이 시작된 셈이다. 1588년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한 스페인 무적함대(Armada) 격침을 계기로 영국은 대서양 제해권을 독점하게 돼 노예무역에 전혀 장애물이 없었다. 노예무역의 무대였던 대서양은 당시 영국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세계법이나 마찬가지인 당시 영국법에 따르면, 당초 영국 식민지들과의 무역은 반드시 영국 회사가, 영국 선원을 이용해, 영국 배로만, 영국 항구와 식민지 항구 사이를 오가는 방식으로 이뤄지게 돼 있었다. 1739년에 들어서야 영국 상인들이 영국을 거치지 않고 식민지에서 다른 유럽 항구로 직접 수출하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유럽~아프리카~미주를 잇는 다른 삼각무역 루트가 개발된 셈이다. 이때 아프리카와 미주를 오가는 항로가 악명 높았던 중간항로(Middle Pasaage)였다.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에게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애환의 항로였다.
   
   
   산업혁명 기반도 결국 노예무역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완성할 수 있었던 기반도 바로 이 삼각무역에서 만들어졌다. 노예무역 선단의 선원들과 선단 보호를 위해 영국 해군(Royal Navy)은 수병 배양에 힘썼고 항해술도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노예무역에서 나온 자금이 아니면 영국의 산업혁명도 불가능했다. 실제 1761년에서 1807년 사이에만 영국 항구를 통해서 142만명의 노예가 거래됐고 여기서 나온 6000만파운드(현재 가치로 12조원)가 운하, 철도, 도로, 항만, 공장, 도시 건설에 투자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산업혁명의 기반시설이 결국 노예무역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노예무역 덕분에 세금을 적게 걷어도 국가가 잘 운영되자 시민들은 더욱 부강해졌다. 또 노예무역을 뒷받침하는 각종 산업이 발달해 향후 영국의 먹거리로 등장했다. 금융업과 보험업이 대표적이다. 노예무역을 위해 바클레이은행이 1690년, 로이드 재보험이 1688년 탄생했다. 노예무역으로 만들어진 이윤이 바로 영국 상류층 형성에 원동력이 된 셈이다. 결국 영국 국가와 사회 그리고 영국인 모두에게 노예무역은 원죄가 되었다.
   
   당시 영국 노예무역선은 아프리카 노예상인을 위한 면제품, 총기, 위스키와 흑인 추장들을 위한 면제품, 냄비·프라이팬 같은 주방용기, 여성 장신구 등을 싣고 갔다. 당시 영국에는 총기 제작사만 4000개가 있었는데 이들이 만드는 연간 10만정의 총기를 노예상들이 소비했다. 노예를 사서 그 배에 싣고 미주로 가서 판 뒤 다시 영국인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흑인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 담배, 커피, 목화를 사서 싣고 와 영국과 유럽에 팔면 한 순환의 삼각무역 항해가 끝났다. 이런 식의 삼각무역 항해 한 번에 6개월가량 걸렸다.
   
   영국 노예상이 아프리카 노예들을 실어나르던 카리브해 서인도 섬들은 서구에서 한창 유행을 타기 시작한 커피, 담배, 설탕 같은 기호품과 면화를 키우기에 아주 적합한 기후였다. 특히 서인도제도산(産) 설탕은 엄청 선호하는 농산물이어서 당시 설탕 1.5㎏이 송아지 1마리 가격에 해당했다. 꿀과 조청으로만 단맛을 즐기다가 설탕이 공급되면서 유럽인들은 설탕의 단맛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당시 서인도제도에서 생산되던 설탕은 유럽 무역고의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그 무렵 중국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홍차도 유럽 상류층의 식탁에 등장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전에는 유럽 귀족이 찾던 박래품(舶來品)이 주로 중국 비단, 인도 향신료였으나 이제 커피와 설탕, 담배로 기호품이 바뀌었고 그중에서도 서인도제도산 설탕, 커피, 담배가 인기를 독차지했다.
   
   

 
   끔찍한 영국의 노예선 내부
   
   결국 이런 제품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노예가 필수적이었다. 서인도제도의 기후에 익숙한 아프리카 흑인들은 고열과 습기가 높은 곳에서 직사광선을 쬐며 하루에 18시간, 심지어는 48시간을 조금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했다. 아무리 고온다습한 기후에 익숙한 흑인들이라고 해도 중노동에 시달리면 3년을 못 견디고 죽기 일쑤였다. 때문에 계속해서 그 자리를 메울 새로운 노예들이 필요했다. 아프리카에는 흑인이 얼마든지 있었고 노예 수요가 계속 생겨나니 노예무역은 성황을 이룰 수 밖에 없었다.
   
   노예 사냥 방식도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예상인들이 고용한 백인 전문 사냥꾼들이 노예를 납치해 왔지만 나중에는 흑인들에게 총기를 내주고 노예를 잡아오면 돈을 주는 방식도 성행했다. 흑인이 흑인을 잡아 팔아먹은 것이다. 흑인들은 이웃 마을을 침략해 포로를 잡아와 백인들에게 넘기기도 했다. 심지어는 추장이 자기 휘하의 동족을 팔아넘기는 일도 많았다. 노예상인들은 흑인들이 아프리카에 있으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생하니까 자신들이 데려다가 잘 먹이고 입히고 심지어는 기독교인으로 만들면 영적으로도 구제하는 셈이니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는 괴변까지 늘어놓았다.
   
   미국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600년대에는 미국 남부에 목화농장이 생겨나면서 노예 인력이 더욱 많이 필요해졌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이민자들은 미국 남부의 높은 온도와 습기에 적응을 잘 못 해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찾게 되었다. 노예는 일단 구입을 하면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니 미국 농장주들이 좋아했다. 이 무렵부터 노예선은 어떻게 하든 더 많은 노예를 실으려고 선박 개조에 들어갔는데 사람이 누우면 서로 어깨가 닿을 정도로 촘촘히 노예들을 배에 실었다. 거기다가 층을 여러 개 만들어 천장 높이도 몸을 펴고 설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결국 항해 기간 동안 노예들은 낮에는 바닥에 앉아 있고 밤에는 눕는 것이 고작이었다. 완전히 양계장 우리에 갇힌 닭 같은 신세였다. 노예들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나 상품으로 취급되었던 셈이다. 실제 당시 선박 항해일지에도 ‘아프리카인 화물(African cargo) 몇 개(piece)’라는 식으로 기록돼 있다.
   
   노예선에 갇힌 흑인들은 악취와 나쁜 공기 때문에 견딜 수 없이 힘들어했고 온도가 높아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거의 도살장 같은 분위기였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음을 택한 노예들이 음식을 안 먹고 버티고 있으면 입을 벌려 강제로 음식을 먹였다. 음식을 거부하면 입을 강제로 벌려 먹이기 위한 쇠로 만든 기구도 아직 남아 있다. 특히 남자 노예는 발목에 쇠사슬도 매어 놓았다. 자살과 반란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여자 노예는 쇠사슬은 채워놓지 않아 좀 자유로웠지만 주방 일과 청소, 세탁에 동원됐다. 여자 노예들은 대개의 경우 남자 선원들로부터 성착취를 당했다. 선원들이 탈출이나 반란을 막으려고 가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아 화주인 노예상인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부탁을 했지만 선원들은 목숨이 달린 일이어서 잘 지키지 않았다. 운임 지급 방식도 처음에는 배에 싣는 노예 숫자대로 받다가 나중에는 살아서 배달되는 노예 숫자만 계산해 운임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선원들은 노예들이 반항하지 않는 한 상품에 해가 가지 않도록 거칠게 다루지는 않았다. 노예가 죽으면 손해이고 약해지면 상품가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갑판에 올라와 춤도 추고 운동도 하게 했다. 물론 갑판에 있을 때도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쇠사슬은 채웠다. 당시 흑인들 사이에는 바다에 빠져 죽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310만명 중 40만명이 항해 중 죽어
   
   당시 항해 중 노예 사망률은 20%나 되었다. 주로 이질 같은 수인성전염병이 원인이었다. 영국이 직접 판 노예가 310만명인데 그중 270만명만 도착했다는 통계도 있다. 결국 40만명이 항해 중에 죽었다는 말이다. 심한 경우는 노예의 반이 항해 중에 죽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상인의 손해는 없었다. 많이 죽으면 죽은 대로 살아남은 노예가 건강함을 인정받아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아주 심한 가뭄이 들어 포도 수확이 줄어든 해는 포도 당도가 높아져 포도주 값이 많이 올라 손해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악명 높았던 영국의 노예선은 배 한 척에 400~500명을 실었는데 가로×세로 130×160㎝ 공간에 한 명이 할당되었다. 돌아누울 공간도 없었다. 승객 6명을 싣던 6t의 유람선이 30명의 노예를 실어 날랐다는 기록에 견주어 보면 566t의 배는 100명의 선원과 700명의 노예를 싣고 다녔다. 267t의 배에 609명의 노예를 실어 1t당 2.3명을 실은 기록도 있다. 결국 1788년 영국에서 ‘돌벤법’이 제정되었다. 선박 1t당 노예 1명만 싣게 노예선의 환경을 법으로 정한 것이다. 법 개정 전에는 600여명의 노예를 싣고 다니던 배가 이 법으로 인해 454명만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출발 전 항구에서 노예 숫자를 확인했고 도착지에서도 확인했다. 그러나 관리를 매수해서 노예를 더 싣고 가도 중간에 사망하니 도착해 확인할 때는 법정 숫자에 가까워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1500년대부터 1800년까지 5만4000차 노예선이 1250만명의 노예를 실어 날랐는데 그중 무려 180만명이 항해 중에 죽었다. 1700년대 100년간 노예무역 호황기에만 600만명을 실어 날랐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노예 가격은 모든 상품 가격과 같은 원칙에 의해 결정되었다. 수요와 공급, 시장 상황에 따라 가격 변동이 있었다. 일단 젊고 건강하고 강한 노예가 최고의 가치를 누렸다. 노예 수요는 많은데 운송이 원활치 않아 공급이 달리면 가격이 올라갔다. 1860년 미국 버지니아 노예상인의 재고 목록을 보면 20살의 특급 남자(extra men) 노예는 1500~1600달러(현재 가치 5400만~5800만원), 특급 여자는 1275~1975달러(4600만~4800만원), 1급 남자 노예는 1400~1500달러(5000만~5400만원), 1급 여자 노예는 1275~1325달러(4600만~4800만원)의 가격이었다. 생각보다 고가였지만 따지고 보면 거의 30~40년을 부려먹을 수 있으니 다른 가축들보다는 훨씬 유용했다.
   
   물론 노예 가격에도 엄격한 기준이 있었다. P는 노예 가격, k는 노예로 일한 연수, H는 20~50세까지 노예의 1년 임대료, N은 연중에 살아 있는 노예 숫자, r은 이자율 등을 엄밀하게 계산해서 가격을 매겼다. 1750년대 영국의 노예 가격은 미국에 비하면 훨씬 저렴한 편이었다. 손 하나를 덜 거친 탓이었다. 예를 들면 25세의 건장한 남성 노예는 1만6300파운드(2500만원), 요리와 세탁을 할 수 있는 45세 여성 노예는 7000파운드(1000만원) 정도였다. 한 노예상인이 가진 54명의 노예 재고 가치가 현재 화폐 가치로 50만파운드(7억5000만원), 평균으로 따지면 한 명당 1380만원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노예무역으로 성장한 리버풀, 글래스고
   
   1700년대에서 1800년대가 되면서 영국의 노예무역 중심은 동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옮겨갔다. 자연스럽게 노예무역 항구도 서해안의 브리스톨, 리버풀, 글래스고로 바뀌게 되었다. 1700년대 말 영국 노예무역의 60%를 리버풀이 담당했는데 1780년 리버풀은 제일의 노예선 건조 항구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 국립 노예박물관이 지금도 리버풀의 그 부두에 있다. 런던도 1600년대 후반에 들면 이미 노예무역을 통해 돈을 많이 번 도시였다.
   
   1700년대 초만 해도 브리스톨, 리버풀, 글래스고는 작은 어촌마을이었는데 1800년대 초에 들면 모두 4~5배로 덩치가 커졌다. 리버풀 인구는 노예무역 덕분에 1700년대 5000명에서 1800년에 7만8000명으로 늘었다. 리버풀은 목화, 브리스톨은 설탕, 글래스고는 담배 취급 전문 항구가 되었다. 동시에 세 항구는 선박 건조·수리 전문 항구가 되기도 했다. 특히 리버풀에서는 선박 건조 산업이 발달하였다. 1750년을 기점으로 영국에서 목면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중남미에서 수입하는 목화로 면방직 산업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산업혁명이 불이 붙었다. 특히 리버풀항구를 통해 북미와 중남미 노예농장에서 생산되어 수입한 목화가 맨체스터와 인근 공장에서 소비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면의류들이 아프리카와 북미와 중남미로 수출되었다. 결국 1700년대 영국 및 유럽 경제는 노예무역과 노예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삼각무역으로 유지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은 노예를 미주로 팔아 이익을 얻고, 노예들이 생산한 기호품을 수입해 영국과 유럽에 팔아 또 이익을 얻고, 서인도제도에서 흑인들이 생산한 목화를 이용해 생산한 면제품을 팔아 또다시 수익을 챙겼다.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무역이었다.
   
   당시 대개의 영국인 선주는 식민지에 노예농장도 갖고 있었다. 수많은 노예상이 노예무역으로 쌓은 부로 자신의 저택을 지었다. 그런 마을들 중에는 지금도 마을 전체가 한 가문 소유인 경우가 있다. 노예상들은 학교와 성당을 설립하고 지역사회에 환원도 많이 했는데 그런 인물 중 하나가 노예상인 에드워드 콜스턴(1636~1721)이다. 콜스턴은 당시 아프리카 서해안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찰스2세 왕과 동생 제임스2세가 설립한 로열 아프리칸 회사의 부회장 겸 대주주였다. 이 회사는 1622년부터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금·은·상아·노예를 독점 취급해왔다. 회사 주주 중에는 나중에 ‘자유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계몽주의 철학자 존 로크도 있었다. 이 회사가 판 흑인 노예가 8만4000명이고 항해 중 사망한 노예만 1만9000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거부 노예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수난
   
   노예상 콜스턴은 브리스톨시에 10만파운드(현재 가치 150억원)를 기부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선원 자녀들을 위한 사립학교도 설립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브리스톨시는 콜스턴 사후 174년 뒤인 1895년에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 바로 이 동상을 조지 플로이드 죽음에 항의하는 영국 시위대가 얼마 전 뜯어내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 사건 이후 브리스톨시가 동상을 바다에서 건져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브리스톨 경찰은 동상을 파괴한 15명의 사진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시민들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분위기가 이전 같지 않다. 식민지 인도에서 식량난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죽은 사건의 원흉이 처칠 전 총리라는 이유로 런던 의회광장에 서 있던 처칠 동상에 인종주의자라는 낙서까지 쓰는 판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 모두는 역사적으로나 경제적 이유에서나 흑인 노예무역에 대해 원죄의식을 갖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계기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흑인 인권 운동이 얼마나 사회를 바꿀지는 모르나 노예무역 원조국에서도 분명 변화는 있는 듯하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번역: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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