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헤럴드 단상

특별한 건배의 여운

박근혜 대통령의 길드 홀 만찬 참관기




6일 저녁 로저 기포드 런던 시티 시장의 길드 홀 만찬. 박근혜 대통령의 영국의 마지막 밤이요, 마지막 만찬이었다. 이곳에는 699명의 양국 인사들이 초대됐다. 이런 만찬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스케치해보고 싶었던 나는 다행히 그 기회를 잡았다. 더 세부적인 르포는 준비 중인데 우선 이 지면을 통해 그날 그곳의 시간별 풍경과 소감을 여러분께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길드 홀 만찬은 두 번째다. 9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빈 방문 때 왔었다. 이번 만찬이 그때와 비슷하면서 조금 다른 바(그때는 로비에서 칵테일 파티 없이 바로 만찬장으로 갔다)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번 와봐서인지 내 모습이 한결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옆자리 영국 여성이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두 번째라고 했더니 인생에 두 번씩 이런 만찬에 오는 것은 행운이라고 했다. 사람을 평가절상으로 보는듯했는데 그다지 싫진 않았다. 

이 만찬에 초대받은 남자들의 복장은 대부분 화이트 타이였지만 훈장이 달린 군복이나 가슴과 어깨에 체인을 건 시장 예복을 입은 이들도 눈에 띄었다. 흰색 가발을 쓰거나 지휘봉을 든 사람도 있었다. 복장이 이런 건 ‘드레스 코드(dress code)’를 화이트 타이(White Tie) 또는 전통 복장(National Dress)으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화이트 타이는 흰색 윙 칼라가 된 셔츠, 흰색 조끼, 흰색 나비넥타이에 제비 꼬리 모양의 윗옷과 옆에 줄이 들어간 바지를 입는다. 이런 옷 갖고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하루 빌리는 데만 100파운드가 넘게 들었다. 보험료가 포함된 금액이다. 
여자들의 복장은 이브닝드레스(Evening dress)나 전통 복장(National Dress)이다. 한복을 입은 여성이 몇 있었지만 대부분 드레스를 입었다. 치마폭이 넓고 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웅장한 드레스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개인적인 견해로 한인 여성들의 복장이 영국 여성들을 압도했다. 초대된 한인 여성 모두가 꽤 신경을 쓴 복장임이 역력했다. 그래서인지 곁눈으로 다른 여성의 복장을 살펴보는 여성들의 눈치도 만만찮은 자리였다.

입구에서 초대장으로 신분 검사를 했다. 이 행사에 오기 전 대통령의 동포간담회에 참석했는데 그때 호텔에서는 신분증을 몇 차례 확인하고 금속 탐지기 통과도 했는데 길드 홀에서는 초대장만 보이고 바로 입장했다. 내가 보기에 초대장도 건성으로 보는 느낌. 사전 모임 장소인 로비까지 가는데도 다른 보안장치나 조치가 없었다. 너무 허술하다 싶을 정도였다. 뒤에 뉴스를 보고 알았는데 박 대통령이 7일 영국에서 벨기에로 이동할 때 히스로 공항에서 수행 취재진의 검색을 강화, 대통령 전용기가 40분이나 늦게 출발했다고 한다. 취재진이 모두 탈 때까지 대통령이 기내에서 기다릴 정도로 엄격했다면서 이날은 왜 이랬는지. 

로비로 가는 길은 약 100미터 남짓. 붉은 카펫이 길게 깔려 있는 끝에 10여 명의 중세 전투복을 갖춰 입은 경비병이 창을 들고 양옆에 나열해 있다. 로비에도 이런 경비병이 서있다. 들고 있는 창은 더 길다. 자신의 키보다 두 배 훨씬 넘는 창을 들고 서 있다.
사방 벽을 큰 그림으로 가득 채운 로비에서는 만찬 전 칵테일 파티가 준비됐다. 간단한 음식과 샴페인, 음료, 와인을 든 사람들이 초청인들 사이를 누비며 서빙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많아질수록 목소리는 더 커지고 곳곳에서 인증샷을 찍는 듯 삼삼오오 모여 휴대폰 사진을 찍었다. 한국 여성들의 사진 찍기 사랑은 여기서도 유별났다.  
길드 홀 로비에 있는 유리 상자 안에는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의 문서들이 전시돼 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친필 사인이 된 문서도 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촬영하되 플래쉬를 터뜨리지 말라고 했다. 조심해서 찍었는데 다시 보니 억울하게도 희미해서 누구 사인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

7시 30분, 파란색 한복을 입은 박 대통령이 로저 기포드 런던 시티 시장과 함께 로비로 들어섰다. 시티 시장의 안내로 한쪽으로 나란히 선 사람들과 인사했다. 뒤이어 들어온 장관과 수석, 수행원과 통역까지 모두 화이트 타이를 입었다. 유일한 여성 수행원인 김행 대변인은 한복을 입었다.
일련의 사람과 인사를 마친 박 대통령 곁을 시티 시장이 잠시 비우자 아주 짧은 시간 박 대통령이 통역과 둘이만 서 있는 순간이 있었다. 박 대통령의 등장을 모르는 영국인들은 대통령을 곁에 두고도 자기들의 얘기에 빠져 있었다. 그때 영국 주재원인듯한 일군의 한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몰려와 대통령께 인사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시티 시장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그들은 대통령과 바로 앞에서 대화하는 기회와 행운을 누린 것이다. 한국이었으면 그들이 속한 회사의 회장에게나 있을 법한 기회를 가진 것도 영국이니까 가능한 얘기다.
시티 시장이 다시 주변 사람들을 박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그러자 대통령 주위로 사람들이 모였다. 이날 만찬의 주인공은 그제야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길드 홀에 도착한 박 대통령이 차에서 내리다 한복 치마가 발에 걸려 넘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다치지 않았지만 영국과 한국 양측 인사들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Dramatic Entry"라는 조크로 주위를 안심시키고 행사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는 대통령의 조크로 넘어갔지만, 나중에 경호 의전상 준비 부족이었다는 지적이 나온 부분이다.

7시 50분, 만찬장으로 들어가라는 방송이 나왔다. 아니, 방송이 아니라 육성 안내 고함이다. 영국에는 정중한 고함이 흔하다.
만찬장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아니 로비에 있던 사람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람이 더 많았다. 자리마다 이름표가 있고 안내장에 좌석 배치도가 있어 일찍 자기 자리를 찾아 앉은 것이다. 사실, 처음 온 사람이나 아는 이가 없는 경우 로비에 있기가 무척 불편하다. 참석자 중 한사람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척'하고 있는 것도 이력이 나야 한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로비에 있었던 사람은 이백여 명 남짓? 그렇다면 많은 이에게 이날 대통령 만찬으로의 초대는 누구 앞에서 자랑이 되는 영광이었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에게는 부담스런 선택을 해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600년 역사의 길드 홀. 15세기 초에 만들어졌으니 우리 역사로 치면 태종, 세종대왕 시절이다. 천장은 높고 8개의 샹들리에가 불을 밝힌다. 지금은 기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테라스가 2층 높이 정도에 2개 있을 뿐 따로 이 층은 없다. 이날은 박 대통령과 시티 시장이 앉은 자리 맞은편 이 층 테라스에 꽃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붙였다. 
이날 팸플릿에 나와 있는 좌석 배치도에 따라 참석자 이름을 세어보니 모두 699명이었다. (한국 언론은 650여 명이라고 보도했다) 웅장한 홀이지만 실상 자리에 앉으면 옆 사람과 어깨가 닿는다. 자리는 무척 비좁다. 그래서 옆 사람과 친해지기 쉽지만 워낙 거리가 가까워 말소리가 이중 삼중으로 들리는 불편함도 있다.
만찬장의 전체 구조는 20개의 긴 테이블이 놓여 있는 형상이다. 대통령과 시장이 앉은 메인 테이블은 별도로, 그 외 참석자들의 테이블은 구성이 비슷하다. 짧은 테이블은 18명, 긴 곳은 44명까지 앉는다. 테이블마다 촛대 둘, 트로피 하나, 높게 세운 틀에 꽃꽂이 한두 개로 장식했다. 자리의 주인을 소개하는 이름표가 있고 무궁화 그림으로 표지를 장식한 메뉴판 겸 만찬 안내 책자가 사람마다 하나씩 세워져 있다. 개인별 5개의 잔(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물 2종류, 디저트 와인용), 포크 넷, 스푼 둘, 나이프 둘이 셋팅됐다. 포크가 넷이라면 커피나 차를 빼고도 요리가 적어도 네 번은 나온다는 뜻? 그런데 마지막 포크와 스푼은 솔베트(Sorbet)용이었다.

8시 박 대통령이 만찬장으로 들어섰다. 군악대를 앞세우고 입장하는데 모두가 일어서서 박수로 환영한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천천히 치는 환영의 박수는 박 대통령이 자리에 가기까지 3분이나 이어졌다. 박 대통령이 자리를 잡자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나오고 로저 기포드 런던 시티 시장이 기도를 했다.

바구니에 담긴 빵을 들고 온 웨이터가 먹겠느냐고 묻는 것이 식사의 시작이다. 처음은 메추리 가슴살 요리, 이때 화이트 와인을 줬다. 다음은 국물이 조금 있는 연어 요리, 두 번째 음식에 나이프가 아닌 스푼이 있는 이유를 알았다. 다음은 주요리격인 오리 고기, 1999년 산 프랑스 레드 와인이 나왔다. 무척 단 디저트 와인이 나온 것이 9시 32분, 디저트까지 마치고 커피가 나온 것이 거의 10시였다. 빵부터 커피까지 두 시간 걸렸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있던 촛불은 거의 촛대까지 타들어 갔고 촛농은 흘러내리다 못해 무심코 둔 물컵에 떨어지고 있었다. 내 자리 옆에 동시통역사들이 있었는데 70년대 DJ박스처럼 생긴 유리 상자 안에 한영, 영한 담당 두 통역사가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 앞에는 거의 3시간 동안 물병만 하나 있었다.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 자리마다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는데 9시 52분에 로드 메이어의 건배 제의가 있을 것이라 적혀있었다. 이 시간을 위해 기다린 통역사들이건만 예정된 시간은 이미 지났고 커피와 마지막 와인을 즐기는 참석자들의 목소리는 더 커지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이날의 시간 관념은 짐작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0시경에 서빙하는 이들이 바빠졌다. 코냑, 위스키 등이 든 잔이 참석자들에게 바쁘게 돌려졌다. 특별한 건배(Loyal Toast)를 위해.

연주가 나오자 모두 일어서서 잔을 들었다. 로저 기포드 시장이 건배했다. "The Queen". 이어서 그는 "한국을 특별한 나라로 생각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최고로 극진히 모시고 있다"는 요지의 연설 뒤 다시 건배했다.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다음은 박 대통령의 만찬사 차례. 박 대통령은 타워브리지 얘기를 꺼내 영국 측 참석자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한국과 영국은 130년된 친구다. 템스 강에 타워브리지가 세워지기 11년 전에 이미 친구다. 우정은 타워브리지처럼 아름답고 튼튼하게 130년을 이어 온다."는 내용이었다. 박수가 터진 건 이 대목이었다. 이어 “한국 속담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과 영국은 강산이 13번 변할 동안 변치 않았다.”며 건배했다. "The Lord Mayor and The City of London Corporation". 

한국과 영국의 경제 협력에 관한 박 대통령의 연설은 이미 많은 매체에서 소개됐기 때문에 이글에서 줄였다. 박 대통령의 만찬사는 10시 22분에 끝났다. 그리고 4분 뒤 퇴장하면서 이날 만찬도 막을 내렸다. 처음 만났지만, 옆자리에 앉은 것도 인연인지라 언제 다시 한번 우연히라도 만나면 인사는 하자는 식의 작별을 영국인들과 하고 나오는 길에 보니까 만찬장 벽에 처칠 경의 전신 조각상이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 있었는데 3시간 동안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그런데 길드홀 광장에 나오니 집에 가려면 서둘러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무궁화가 그려진 팸플릿 하나는 꼭쥐고 있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건배의 여운이 그곳에 남아 있는듯 꼭쥐고 있었다.

헤럴드 김종백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