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영국에서 시대를 이어가며 계속 회자되는 명연설이 몇 개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1601년 11월 30일 의회에서 한 마지막 연설이다. 하원의장을 포함한 141명의 하원의원들 앞에서 한 이 연설을 영국인들은 ‘황금 연설(the Golden Speech)’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훌륭하고 대단한 연설이라는 뜻이다.
사실 연설이란 아무리 현란하고 감동을 주는 내용이라도 연설을 통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걸 이루지 못하면 허황한 말장난일 뿐이다. 그런데 이날 여왕은 그때까지 영국인들이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진솔한 심정을 토로해서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여기에 설득된 하원의원들은 여왕이 원하는 바를 두말 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솔직한 심경 토로한 절대권력자 
 
당시 하원의원들은 여왕에게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여왕이 허가한 각종 상품 독점권으로 인해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며 독점권 폐지를 청원하려고 모인 상태였다. 하지만 여왕은 단 1026단어의 짧은 연설로 의원들을 설득해 위기를 극복했다. 뿐만 아니라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도 껐다. 즉 아일랜드를 침공한 스페인군과 싸울 전비를 충당할 특별세금법을 하원의원들이 통과시켜 준 것이다. 물론 여왕의 연설에 감동만 해서 통과시켜 준 것은 아닐 것이다. 여왕은 의원들의 불만 요인인 전매특허권의 경우 자신의 뜻이 아니라 일부 악덕업자들이 남용한 탓이라고 화살을 돌렸고 의원들에게 폐지를 약속했다. 어찌 보면 주고받는 거래의 성공이었다. 자신이 업자들에게 독점권을 준 이유가 세금을 올리지 않으려는 공익적 차원이었지만 국민들 불만이 팽배하자 즉시 폐지를 약속해 의원들을 다독인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이 원하는 전비 세금을 얻어낸 것이다. 정치란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면서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도 여왕은 보여준다.
 
이날 거래를 이끌어낸 여왕의 연설은 그 자체로도 훌륭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어명(御命)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시대에 거의 신(神)과 같은 절대권력자가 의회에서 현대 정치인 같은 호소와 간청을 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시 한 하원의원은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이 연설은 금으로 쓰일 만한 가치가 있다(worthy to be written in gold)”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후 영국에서는 ‘명연설’이라는 말이 나오면 황금처럼 소중한 이 여왕의 연설을 예로 든다. 우리는 여왕의 연설을 통해 한 나라의 통치자가 어떤 식으로 국민들에게 접근하고 소통해야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 실제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의 1000년 역사에서 지금도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군주이기도 하다.
 
“의장님! 우리는 당신의 발언을 들었고, 우리 재산을 아껴주려는 당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장담합니다. 어떤 왕자(여기서 여왕은 자신을 가리켜 pince라는 남성형 단어를 일부러 썼다)도 자신의 신민을 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을 향한 내 사랑은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값진 보석일지라도 이 보석보다 더 귀중하지 않습니다. 나를 향한 당신들의 사랑 말입니다. 나는 그것을 그 어떤 보물이나 재물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도 잘 압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나에 대한 사랑을 나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게 여깁니다.”
 
이런 말로 분위기를 잡은 여왕은 더욱 진솔한 감정을 담아 말을 이어간다.   
 
 
 
 
“당신들이 내게 주는 사랑으로 통치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 신민들을 만족하게 하는 소명 말고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하느님과 신민들에게) 지고 있는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비록 높게 올리셨으나, 그것은 내 왕관에 따르는 영광일 뿐이고, 나는 당신들이 내게 주는 사랑으로 통치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저를 여왕으로 만드신 것을 결코 즐기지 않고 차라리 저렇게 감사해 하는 백성들의 여왕이 된 것이 기쁠 뿐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잘살게 되는 그날보다 더 오래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나는 내가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분의 도구가 되어 당신들을 위험, 불명예, 수치, 폭군, 압제로부터 구할 바로 그 사람임을 믿습니다.”
 
여왕은 여기까지 의원들이 듣고자 하는 국내,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주로 신민들에 대한 사랑, 그들의 복지, 신에 대한 충성, 완전한 정의 실현 등을 강조할 뿐이다. 거기다가 거의 자기비하에 가깝게 자신을 낮추며 과거의 어떤 절대권력자도 쓰지 않던 방식의 연설로 일관한다. 여왕의 말에서 어떻게든 흠을 잡아 논쟁을 벌이려던 의원들은 처음부터 허를 찔린 듯 놀란다. 여왕의 연설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런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날 당신들의 자발적인 도움을 우리는 흔쾌히 받아들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주에 대한 당신들의 선의의 사랑과 충성심의 크기이기 때문입니다.(이 대목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전비 세금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돌려서 말한 것이다. 아직 의원들이 세법 통과 논의도 안 했는데 ‘자발적인 도움’ 운운하면서 선수를 치고, 내가 원하는 전비 특별법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나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식의 은근한 협박도 가한 셈이다.) 본인으로 말하자면 탐욕스럽고 욕심이 많아 무엇이든 잡고 놓지 않는 사람도, 물건을 움켜쥐는 사람도 결코 아닐 뿐 아니라 고집불통의 왕자도, 낭비하는 사람도 물론 아닙니다. 나는 속세의 어떤 재물에도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내게 주는 것을 나는 쌓아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신들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 받겠습니다. 그러므로 의장님께서 상상하듯이 내 혀가 감히 모두 표현하지 못하는 내 마음 깊은 곳의 감사를 그들에게 전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지금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당신들이 협조하면 나는 그걸 헛되이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적을 내쫓고 나면 잊지 않고 꼭 갚겠다는 뜻이다.)”
 
여왕의 연설은 이어 핵심 이슈로 들어간다. “당신들이 내게 알려주지 않았으면 내가 진실을 모른 채 실수를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독점 특혜의 폐해로 받는 국민들의 고통을 의원들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이라는 뜻이다.) 내가 여왕이 된 이후 누구에게도 특혜를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독점권은 증세를 하지 않고 전비를 마련하는 수단으로 선택한 일이지 누구 배불리려고 특혜를 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러 가지 이유와 명분에 의해 내가 준 특혜가 신민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도 하게 만들었지만 나의 오랜 중신들 중에 그걸 이용해 사익을 취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모두 나의 책임입니다. (중략) 내가 내린 독점의 특혜가 우리 국민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되고, 특허 명분의 특권을 가진 억압자들 때문에 우리들 왕권의 존엄이 침해받아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통치해왔다” 
 
 
 
이어 여왕은 잘못에 대한 책임과 응징도 언급한다. “그렇습니다. 내가 이런 사실을 들었을 때, 그것을 개편할 때까지 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고 자신의 의무를 팽개치고, 우리의 명예를 훼손한 그들이 과연 처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의장님, 당신에게 확실하게 말하지만, 이건 내가 원하던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영광이나 더 큰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과오, 고난, 고통, 억압은 나의 신민이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부정직하고 선정적인 사람들이 자행한 것이고 그들은 적절한 처벌 없이 탈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약에 좋은 향기를 입히거나 약의 껍질을 금으로 싸서 당의정으로 만들어 약을 쉽게 삼키게 했습니다.(자신들이 저지르는 악행을 왕을 이용해서 숨기려고 하는 술수를 말한다.)” 
 
여왕에게 따지러 온 의원들에게 여왕은 당신들이 독점 혜택을 받지 못해 화가 나서 그런 야비한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는 말을 돌려서 한다. 독점권이 일으킨 폐해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고, 일부 욕심 많은 자들의 악행의 소행이고 절대 용서 안 하겠다고 선공으로 제압한다. 동시에 자신의 통치 권한은 신성불가침이라고 선언해서 의원들의 입을 닫게 만든다. 당시만 해도 왕의 절대권력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왈가불가 못하던 때였는데 이렇게 일침을 놓는 여왕한테 누가 어떻게 따지고 들겠는가? 그러면서 여왕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신과 신민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것임을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자신은 너희 같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신의 하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감히 넘보지 못하게 못을 박은 것이다. 또 자신이 독점권을 준 이유는 그들의 잘못된 설득(false persuasion)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이어 여왕은 자신의 소임을 강조하는 유명한 대목을 얘기한다.
 
“나는 최후의 심판 날을 내 눈앞에 정해놓고, 그때는 최고의 심판관 앞에서 심판을 받을 걸 염두에 두고 통치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왕으로서의 나의 선의는 악용되었고, 내가 준 독점권은 내 의지, 의도와는 달리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내 신하들 중 내가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을 소홀히 했거나 왜곡했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악과 범죄를 내 책임으로 돌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왕은 의회가 국민들의 불만에 올라타려는 낌새를 채고 연설 초반 자신은 책임이 없고 몰랐다고 선수를 치면서 반드시 잘못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날 여왕은 두 가지 기법을 통해 연설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하나는 복잡하고 애모호한(ambiguous) 내용을 통해서, 다른 하나는 미사여구적(euphuistic)이면서도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중들을 혼돈에 빠지게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매력적인 산문체(adorned prose)를 써서 빠져나가는 기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중요한 쟁점이나 곤란한 쟁점이면 슬쩍만 언급하고 금방 넘어가는 수법도 썼다.
 
드디어 여왕은 신민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극도의 수사로 전달한다. “나는 국왕(여왕은 자신을 남성형의 단어 King으로도 호칭한다. 여왕이 된 초창기 중신들의 업신여김에 대한 반발로 왕이라는 칭호를 평소에 자주 썼다)의 칭호가 영광의 칭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왕권의 빛나는 영광이 우리 지혜의 눈을 멀도록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행동에 대해 위대한 심판관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기억해야 합니다. 한 명의 왕이 왕관을 쓰고 왕이 되어 받는 즐거움보다 그걸 보는 자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어야 합니다. 나 자신은 왕의 영광스러운 이름이나 여왕의 왕권에 매료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말했듯이 위험, 불명예, 폭군, 폭정으로부터 그분의 왕국을 수호하고 그분의 진리와 영광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자신의 도구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기쁠 뿐입니다. 내 조국에 대한 열의와 내 백성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당신들의 행복과 안전을 이루려고,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나보다 더 던질 나와 같은 자리의 여왕은 없을 것입니다. 나의 삶과 통치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살지도 통치하지도 않겠다는 것이 나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나보다 더 강력하고 현명한 왕자들이 많이 앉아 있었고 장래에 있을 수도 있지만, 나보다 더 당신들을 보살피고 사랑이 많은 왕자는 한 명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절대권력자도 없고, 심지어 신의 존재마저 의심받는 현대와는 달리 400여년 전 엘리자베스 시대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잃을 만한 엄청난 죄였던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왕권은 절대적이라서 군주가 하는 신에 대한 맹세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군주의 이런 진솔한 연설은 엄청난 설득력을 발휘했다.
 
“오 주님, 내가 누구입니까? 관습과 위험을 지나쳐 온 내가 두려워할 일이 뭐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내가 나의 어떤 영광을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금하시는 일입니다. 감사원장님, 장관님, 그리고 의원들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이 신사들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모두 데려와 제 손에 키스하게 해주세요.”
 
 
 
삶의 지혜가 가르친 설득의 기법 
 
 
 
여왕의 연설 내용은 당시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생사여탈권은 물론 인간을 구제하고 멸망에 빠뜨릴 수 있는 거의 신 같은 절대권력자가 한 표를 구걸하는 현대 정치인처럼 국민들의 감성에 호소하고 자신을 이해해 주길 간청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을 무엇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그래서 그들을 돌보는 일이 신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고 호소하는 여왕 앞에 의원들은 무릎을 꿇고 승복하면서 손에 입맞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왕의 현란한 수사, 감성적 호소, 은근히 돌려서 자신의 뜻을 전하는 수법 등은 당시 절대권력자들이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방식이었다. 설득이 필요치 않았고 그냥 어명만 내리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왕은 그런 방식으로 통치하지 않았다. 여왕은 애초에 군주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던 신세였다. 남동생 에드워드 6세가 6년간 통치하다 죽고, 언니 메리 여왕마저도 겨우 5년간 재위하다 죽어서 어쩌다가 여왕이 되었다. 겨우 말을 하기 시작하던 3살 때 어머니이자 아버지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앤 불린이 아버지에 의해 사형당한 뒤 여왕은 정말 단두대에 한 발을 항상 올려놓고 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이 무효가 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사생아가 되어 버린 정말 기막힌 신세였다. 그래서 여왕이 된 25살 때까지 22년간을 정말 눈치만 보고 하루하루 생명을 부지하고 살았다. 그런 세월이 여왕에게 가르쳐 준 지혜가 바로 여왕의 좌우명인 ‘보되 말하지 않는다(Video et taceo)’였다. 또 ‘변하지 말고 언제나 같자(Semper Eadem)’도 생존의 지혜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인지 여왕은 여론 조작의 천재이기도 했다.(필자의 주간조선 2013년 1월 7일 자 ‘박근혜의 롤모델 엘리자베스 1세: 죽음 곁에서 배운 생존전략 三不二行’ 참조) 그렇게 여왕은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고 적을 만들면 죽는다는 삶의 지혜를 통해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과 기법을 터득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현대 정치인 뺨치는 여왕의 그런 기술과 기법이 바로 이 황금 연설에서 최대로 발휘되었다. 현장에 있었던 어떤 의원은 ‘여왕은 정말 위대한 배우(the great actor) 같았다’는 기록도 남겼다.
 
여왕이 연설하던 이때는 영국 역사에서도 특이한 시기였다. 1561년의 영국 인구는 298만명이었는데 40년 뒤인 1601년에는 34%가 늘어나 400만명이 되었다. 그 결과 곡식을 비롯한 생필품과 소비품의 수요도 엄청나게 늘었다. 1566년과 1641년 사이 영국 총생산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국내 시장을 독점하는 특혜의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설탕, 유리병 같은 생활필수품도 독점에 묶여 소비자들은 고통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의회는 여왕이 개회를 해야 모일 수 있었다. 의회 일정도 여왕이 정했고 논제도 여왕이 허락하는 것만 협의할 수 있었다. 의회는 여왕이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일반적인 토지세나 관세 같은 세금은 의회 승인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비 같은 비상 예산을 조달하기 위한 세금은 의회가 승인해 주어야 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당시 군주들은 의회를 잘 열지 않았다. 여왕의 45년간 통치 기간 중에도 의회가 겨우 13번 열렸는데 한 번 개회하면 평균 3주 동안 열렸다. 의회가 열려도 여왕의 측근들로 이루어진 추밀원 의원들이 거의 통제를 했다.
 
황금 연설을 하던 당시 68세였던 여왕은 노쇠해 가던 상태여서 의회 통제력도 잃어가기 시작했다. 총리대신으로 26년간 옆에서 정책자문을 하고 의회를 장악했던 윌리엄 세실 경도 이미 3년 전 여왕 곁을 떠난 상태였다. 
여왕은 황금 연설을 원고 없이 즉석 연설을 하듯 해냈다. 그래서 공식 문서로도 남아 있지 않고 현장에서 적은 원본 4개만 남아 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분명 여왕이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문서에 적지 않고 당시 암기 방법으로 유행하던 ‘수사적인 궤적 방식(method of rhetorical loci)’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한다.
 
여왕의 황금 연설 중에는 기억해 둘 만한 어구가 많다. “한 명의 왕이 왕관을 쓰고 왕이 되어 받는 즐거움보다 그걸 보는 자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어야 합니다(To be a king and wear a crown is a thing more glorious to them that see it than it is pleasant to them that bear it)” 같은 구절이 대표적이다. 결국 왕은 자신의 영광보다는 신민들이 더 자랑스러워하는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경고이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당신들이 잘살게 되는 걸 보는 그날보다 더 오래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Neither do I desire to live longer days than I may see your prosperity and that is my only desire)’도 국민들에 대한 진솔한 사랑을 표시한 유명한 구절이다. 
 
특히 한 나라의 통치자라면 바로 이 문구를 명심해야 할 듯하다. 
“나는 최후의 심판 날을 내 눈앞에 정해 놓고, 그때는 최고의 심판관 앞에서 심판을 받을 걸 염두에 두고 통치했습니다.(I have ever used to set the Last Judgement Day before mine eyes and so to rule as I shall be judged to answer before a higher judge.)” 
섬뜩하지 않은가? 조선 왕의 왕관 면류관 앞에 달려 흔들리는 옥구슬의 의미와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소스 1세와 정신(廷臣) 디모클레스가 나눈 옥좌 위 가느다란 실에 매달린 시퍼런 칼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 런던통신- 엘리자베스 1세의 ‘황금 연설’ hherald 2024.06.24
3034 요가칼럼- 하체운동하며 뱃살까지 빠지는 최고의 운동-브릿지 자세 file hherald 2024.06.24
3033 김준환변호사칼럼 - 세기의 재산분할 판결 hherald 2024.06.24
3032 신앙칼럼- 존재의 소중함 hherald 2024.06.24
3031 부동산 상식- 여름 휴가, 집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hherald 2024.06.24
3030 헬스벨 - 머리가 왜 이렇게 멍한가 hherald 2024.06.24
3029 요가칼럼- 살 뺄때 무조건 하는 8분 타바타 운동 file hherald 2024.06.10
3028 신앙칼럼- 책갈피미래를 향한 부르짖음 hherald 2024.06.10
3027 부동산 상식- 영국 총선, 부동산 시장에 미칠 영향은? hherald 2024.06.10
3026 특별기고-지금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외쳐야 하는 이유 file hherald 2024.06.10
3025 김준환 변호사칼럼- 메이저리그 야구, 런던에 오다. hherald 2024.06.10
3024 헬스벨- 전당뇨도 이미 당뇨 hherald 2024.06.10
3023 요가칼럼- 탄력있는 상체와 슬림 하체 보장! 올인원 1시간 전신운동과 요가 file hherald 2024.06.03
3022 김준환 변호사 칼럼 -버킷리스트 hherald 2024.06.03
3021 런던통신-골때리는 영국 축구 클럽 간 숙적 관계 hherald 2024.06.03
3020 헬스벨- 살다보면 한의학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hherald 2024.06.03
3019 신앙칼럼- 존중의 법칙 hherald 2024.06.03
3018 부동산 칼럼- 임차 주택의 열쇠 관리, 어떻게 하고 계세요? hherald 2024.06.03
3017 요가칼럼- 하루5분 플랭크로 뱃살 걱정 끝 ! hherald 2024.05.20
3016 런던통신- ‘소확행’으로 살아가는 영국인들의 기이한 취미활동 hherald 2024.05.20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