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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스버러 축구장 참사’ 27년 만에 ‘경찰의 과실 치사’ 판결 나와

  
‘힐스버러 축구장 압사 사건’은 1989년 4월15일 발생했다. 이날 영국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프로축구 클럽 간의 영국축구협회컵(FA Cup) 준결승전이 셰필드 축구클럽 소유의 힐스버러 축구장에서 열렸다. 리버풀 팬 96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중경상을 입은 세계 축구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그런데 지난 4월26일(현지 시각) 다시 열린 법정에서 배심원단은 27년 전 당시의 참사가 팬들의 잘못이 아닌 경찰의 ‘과실치사(unlawful killing)’였다고 판단했다. 희생자들의 사인(死因)이 사고사가 아니고 비합법적인 살인이었다는 것이다. 리버풀 팬들은 이 사건에 아무런 책임이 없고, ‘경찰의 제도적이고 괴멸적인 결함으로 인한 판단 착오로 생긴(caused by catastrophic institutional failing) 사건’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미 2012년 독립조사위원회 보고서가 진실을 밝힌 후 무려 3년7개월 만에 법정에서 보고서와 똑같은 내용을 법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절차였다.
 
이번 재판은 영국 법 역사상 배심원 재판으론 가장 긴 재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14년 3월31일 시작한 재판 기간 2년 동안 10명의 배심원은 일상을 희생하고 재판 일수로만 300일 동안 법정에 참석해 재판장이 제시한 14개의 의문에 대한 결론을 내기 위해 1000여 명의 증인과 양측 변호사들의 지루한 증언을 들어야 했다. 이 의문은 독립위원회 보고서가 이미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런데도 이를 다시 법적인 절차를 통해 확인하기 위해 들어간 경비는 천문학적이다. 지금까지 들어간 경비만 1억1600만 파운드(약 1914억원)에 달한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이 재판이 이제 겨우 진실규명의 2단계의 끝일 뿐이라는 점이다. 사건 해결의 최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재판의 판결을 근거로 3단계인 해당 책임자들의 형사책임에 대한 조사가 다시 시작된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얼마만큼의 국민 세금이 더 투입돼야 할지 모른다. 참사에 책임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형사책임을 물을 것인지를 검찰이 결정한다. 검찰이 형사 처벌하겠다고 결론을 내리면 마지막 4단계인 형사소송이 벌어진다.
 
‘테일러 보고서’는 경찰에 면죄부 준 셈
 
힐스버러 참사는 현장 책임 경감이 별 고민 없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축구장 안 좁은 입석 공간에 갑자기 관객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생긴 압사 사고였다. 문제는 이후의 경찰 행동이었다. 참사 다음 날 사우스요크셔 지방 경찰 수뇌부는 바로 사태 진상 은폐 대책회의를 시작했다. 술 취한 리버풀 팬 폭도 5000명이 경기장에 난입해 벌어진 사고라고 규정하고 여기에 맞는 증거를 찾으라고 현장 경찰들에게 지시했다. 심지어는 검시관에게 아이들 혈액까지 채취해서 알코올 검사를 하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테일러 보고서’라는 힐스버러 참사 첫 보고서는 영국 대형 사고 보고서치곤 이례적으로 상당히 빨리 나왔다. 사고가 발생한 지 1년도 채 안 된 1990년 1월에 나온 보고서는 거의 경찰 보고서의 재판(再版)이었다. ‘입장권도 가지지 않은 음주 상태의 리버풀 팬들의 경기장 난입이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어서 희생자는 ‘사고사(accidental death)’라고 결론 내렸다. ‘경찰의 판단착오가 있긴 했지만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는 논지였다. 결국 경찰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었다.
 
힐스버러 참사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묻힐 뻔했다. 현장에 있었던 리버풀 팬들은 결코 자신들이 난동을 일으킨 적이 없었고, 만취한 폭도들도 없었기에 경찰 주장이 진실이 아님을 알았다. 사망자의 40%인 38명의 10대를 술 취한 폭도로 몰았으니 말이다. ‘입장권도 없는 팬’이라는 누명도 유족들에게는 기가 차는 누명이었다.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모두 입장권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실제 유해에서도 입장권이 나왔다. 이렇듯 유족들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가족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누명까지 씌우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리버풀 팬들과 유족들은 ‘힐스버러 가족 지원 그룹’(힐스버러 그룹)을 만들어 희생자들의 ‘폭도 누명’을 벗기는 데 27년이라는 길고 긴 투쟁을 시작한다.
 
희생자들의 ‘폭도 누명’ 벗긴 끈질긴 투쟁
 
그리고는 테일러 보고서가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회 여론을 환기시켜 세상이 힐스버러 참사를 잊지 않게 했다. 특히 하원의원들을 끝도 없이 방문해 그들에게 자신들의 주장과 조사 내용이 담긴 서류를 전달하면서 재조사를 꾸준히 요구했다. 의회 의원들도 여기에 호응해 잊을 만하면 의회에서 힐스버러 재조사를 요구했다. 유족들은 시차를 두고 강약의 합법적인 압력을 해당 권력기관에 지속적으로 가했다. 재조사 청원을 위해 각 자선단체들의 협조를 얻어 일반인 13만9000명의 서명을 받았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결코 길거리 투쟁을 하지 않았고 합법적 범위 내에서 온건하면서도 꾸준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 세상에 알렸다. 이렇게 ‘어떤 경우에도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끈기와 노력’을 계속했다.
 
힐스버러 참사의 유가족 등이 참여한 ‘힐스버러 그룹’은 진실을 알기 위해 책임 유관기관의 모든 서류의 완전 공개를 요구했다. 사실 이 서류들이 진실규명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공식 문서 공개 기점이 30년이라 유족들로선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2009년 참사 20주년 기념식에 온 당시 문화언론스포츠 장관 앤디 번함이 정부 공식 문서 공개 기점인 30년을 10년 앞당겨주겠다는 약속을 당시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 내각과 협의도 하지 않고 함으로써 진상규명은 아주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힐스버러 그룹은 공개된 각종 서류에서 찾아낸 각종 증거들을 제출했고, 당시 노동당 정부는 어쩔 수 없이 2009년 12월 재조사를 정식으로 하기 위한 독립위원회를 구성한다. 위원회는 85개 유관기관으로부터 45만 쪽의 서류들을 제출받아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위원회는 공개, 비공개를 따지지 않고 제출받은 관련 서류 모두를 있는 그대로 다 웹사이트에 내놓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위원회는 2012년 9월 최종 보고서를 내놓았다. 결국 2년9개월이 걸려 진실이 밝혀졌다. 유족들이 참사 직후부터 주장한 내용들이 모두 보고서에 들어 있었다. 영국은 경악했다. 경관들의 거짓말 마각(馬脚)이 완전히 드러났고 희생자들의 결백이 증명됐다. 고등법원은 이 위원회 보고서를 근거로 준비해서 2014년 3월 특별법정을 구성해 진실을 법정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특별법정의 판결이 만 2년 동안의 재판을 통해 지난 4월26일 나온 것이다. 이 판결로 힐스버러 그룹 캠페인의 모토인 ‘진실과 정의(Truth and Justice)’에서 이제 진실규명의 단계가 끝이 나고, 유족들은 정의 수립 단계의 문턱에 서 있다.


권석하│영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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