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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아! 신영복 선생

hherald 2016.01.18 20:33 조회 수 : 1310

 

분단국가의 고통이 한 사람의 생애에 그대로 비극으로 투영된 삶이었다고 할까. 그러나 이를 원망, 비관, 비난 대신 낙관과 희망으로 우리에게 돌려준 한국의 지성,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타계했다. 생전에 선생이 좋아한 동요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가 영결식장에서 합창 됐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지성이었던 선생은 좋아한 경구 석과불식碩果不食 - 씨과일은 먹지 않고 땅에 심는다 -처럼 다음 세대를 위한 씨과일이 되어 바다로 흘러갔을까.

 

 

선생은 20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구타, 전기고문, 수차례의 사형 구형 및 선고 끝에 만들어진 죄로 '통혁당 지도간부'가 되어 기약 없는 무기수로 살았다. 서울대학교를 다닐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지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야 통혁당의 존재를 알았으니 분명 만들어진 죄인이었다. 물론 후에 사면 복권되고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늘 그렇듯 너무 늦은 초라한 보상이었다.

 

 

그런데 이 징역살이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지성으로 그를 완성시킨 계기가 됐다고 하면 너무 혹독한 이기의 판단일까. 그는 감옥에서 주옥같은 글을 엽서에 박아 보냈는데 그것이 유명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엽서에 박아 보냈다고 표현한 것은 원본 엽서가 연필이나 볼펜으로 쓴 것도 있지만 대부분 철필로 먹물을 찍어서 쓴 것들이기 때문이다. 원본을 본 사람에 따르면 <철필로 먹물을 찍어서 또박또박 박아 쓴 글씨들은 글의 내용보다 더 짙은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20년 감옥살이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안양교도소, 대전교도소, 전주교도소를 거쳤다. 사형을 언도받은 20대 때 교도소에서 하루 두 장씩 지급하는 휴지에다 깨알같이 박아 쓴 글부터 그의 글쓰기 사색은 1988년 광복절 특사로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1971년 <형님의 결혼>이란 글에서 이 엽서편지의 아린 사연을 볼 수 있다. <형님의 결혼은 저에게도 무척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다만 한 장의 엽서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한 장의 엽서를 앞에 놓고 허용된 여백에 비해서 너무나 많은 생각에 잠시 아픈 마음이 됩니다. 이 아픔은 제가 처하고 있는 상황의 표출인 동시에 또 제가 부상(浮上)해볼 수 있는 기쁨의 상한(上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상한上限이 끝없이 높아지며 마치 <민들레 씨앗>처럼 퍼져 <절망 속 희망>으로 우리에게 온다. 선생이 감옥에 있건만. 소위 막장에 뒀건만 <절망의 진흙탕에서 희망의 연꽃을 만들어> 낸다. 그의 사색을 줄여서라도 여기에 옮기기엔 너무 많다기 보다 다른 의미로 너무 크다. 선생의 글, 일독一讀을 권한다. 

혹 지금 마시는 소주가 '처음처럼'이라면 그 글씨가 바로 선생의 글씨다. 어깨동무체라 불리는 신영복체의 독특한 글씨체도 유명하다. 소주회사 부탁에 <가장 서민들이 많이 즐기는 대중적 술 소주에 내 글이 들어간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며 응해 선뜻 글을 써주고는 사례를 받지 않아 소주회사가 1억원을 선생이 있던 성공회대학에 장학금 형식으로 기부했다는 일화가 있다. 

 

 

선생이 생전 좋아한 글귀가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였다. 마지막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흘려보낸 수많은 언약들이 언젠가는 여러분의 삶의 길목에서 꽃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 꽃으로 다시 만나면 더할 나위 있을까요.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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