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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지만 의외로 심한 자괴감도 갖고 있다. 독일인들은 엄청난 목숨(1차대전 1700만명, 2차대전 7300만명)을 앗아간 1·2차 대전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자각을 하고 있다. 양차대전 사망자 9000만명은 당시 유럽인구(5억4000만명)의 거의 17%에 이른다. 그만한 인구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한 전쟁으로 사라졌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유대인 600만명(유럽 전체 유대인의 3분의2)을 학살한 원죄의식에서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다른 형태의 원죄의식에서 비롯된 자괴감을 갖고 있다. 자신들의 불세출의 영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대한 양면적인 감정이 그것이다. 프랑스가 무력으로 유럽을 지배한 데 대한 자긍심은 프랑스 어디에서건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폴레옹이 저지른 이웃국가들에 대한 침략과 그에 따른 죄의식도 갖고 있다. 이와 함께 두 번이나 적국에 파리를 내줬다는 수치심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다. 파리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로 인해 6개 연합국에 의해 점령된 바 있고, 2차대전 중 다시 히틀러에게도 도시를 내준 역사가 있다.
 
 
영국의 트라우마 아편전쟁과 노예무역
 
그에 비해 영국인들은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원죄의식도 없고 자괴감도 없다. 영국은 백년전쟁을 비롯한 중세 때 프랑스와의 전쟁 말고는 근대에 들어와 한번도 이웃국가를 도발해서 전쟁을 일으킨 역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한번도 자신들의 땅에 적군의 발길을 허용한 적도 없다. 이런 점이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영국인들이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에 비해 은근히 자긍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다.
 
그렇다면 영국인들에게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흑역사는 없는가? 물론 있다. 영국인들의 머리를 못 들게 하는 영국의 대표적 흑역사는 두 개다. 첫 번째가 노예무역이다. 아프리카에서 마구잡이로, 정말 채집하듯 흑인들을 잡아 와서 영국을 거쳐 대서양 건너 미주로 팔아치운 흑역사다. 보통 흑인 노예라 하면 미국이 원흉처럼 치부되지만 사실 실속은 영국이 챙기고 미국은 그냥 사용자였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영국이 노예무역의 주역이었고, 1913년 기준 세계 인구와 면적의 4분의1을 차지했던 제국을 건설하는 밑거름도 노예무역이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노예무역과 함께 아직도 영국 지식인들의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흑역사가 바로 중국과 벌인 아편전쟁(Opium Wars)이다. 양식 있는 영국인들은 다른 흑역사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를 찾기도 하지만 아편전쟁과 노예무역에 대해서는 별로 변명을 하려 하지 않고 그냥 수긍하고 만다. 그 정도로 이 두 개의 흑역사에서는 평소 영국인들이 내세우는 보편적 양심이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당시 영국인들에게 중국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차를 생산하는 생산지였고, 차를 사오기 위한 돈을 만드는 아편을 소비 시장(market)이었을 뿐이었다. 찬란한 문화와 문명이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들의 주머니를 불리는 시장으로 대했다. 그런 알짜배기 시장을 중국 정부가 막으니 자국 이익에만 눈이 먼 영국 정부로서는 무조건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보통의 전쟁은 당사자들 나름대로의 대의명분도 있고 역사적인 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1차 아편전쟁(1839년 9월 4일~1842년 10월 24일)과 2차 아편전쟁(1856년 10월 8일~1860년 10월 24일)에는 영국의 이익만 있었지 어떤 대의명분도, 역사적 정당성도 없었다.
 
특히 아편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국이라는 한 나라를 완전히 마약의 구렁텅이에 빠뜨려버린 참극이었다. 자국 이익을 앞세운 보호무역을 위해 한 나라를 철저히 유린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보호무역이라는 악령이 아편전쟁이 발발하던 당시처럼 다시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 관세로 포장된 철저하고 무자비한 트럼프발 보호무역의 기운이 세상의 기존 질서를 뒤집고 세계를 끝모를 혼돈으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펜타닐은 ‘백년의 굴욕’에 대한 응징?
 
당시와는 공격과 수비가 뒤바뀌었지만 어찌 되었건 마약을 핑계로 내세운 보호무역으로 세상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신종 마약 펜타닐을 이용해 미국을 망치려 한다고 의심한다. 그러면서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캐나다와 멕시코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미국을 병들이고 있는 신종 마약 펜타닐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시각이다. 그런데도 중국이 손을 놓고 있는 이유가 바로 자신들이 당한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 대한 보복일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구미 열강들의 중국 착취, 즉 ‘백년의 굴욕(百年國恥·백년국치·the century of humiliation)’에 대한 응징 때문이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지금도 중국이 이를 갈고 있는 ‘백년의 굴욕’은 1·2차 아편전쟁으로 시작되었다. 아편전쟁의 시작은 무역적자였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영국인들의 중국 차(茶) 사랑은 도를 넘어 거의 광풍이었다. 거기에 더해 산업혁명으로 크게 늘어난 소자본주의자(petite bourgeoisie)들의 중국산 비단과 도자기 수요로 인해 영국은 극심한 무역불균형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충분한 자급자족 상태여서 영국에서 굳이 사올 물건들이 없었다. 해서 영국은 매년 일방적으로 막대한 양의 은을 중국 물품을 사기 위해 중국에 쏟아부어야 했다.
 
당시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던 주요 3가지 품목(차, 비단, 난징의류)은 엄청난 규모였다. 통계를 보면 1811년에 차 3961만㎏(현재 금액으로 약 1조6762억원어치), 비단 3만6741㎏(약 112억원어치), 중국풍 옷인 난징의류 12만1000벌(약 3억원어치) 등 당시 돈으로 도합 342만9300파운드(현재 금액 약 9억2488만파운드·약 1조6832억원)어치의 물품을 중국으로부터 사들였다. 1814년 영국 정부 예산이 6600만파운드였으니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금액이 국가예산의 5%였다는 뜻이다.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영국인들의 중국 홍차 사랑은 거의 광적이었다. 당시 영국 상류층의 사교에는 술이 아니라 홍차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중산층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통계로는 중산층 가정이 홍차에 쓰는 돈이 가계비 전체의 5%였다니 놀라운 금액이었다. 그래서 홍차가 중국에서 수확을 하면 누가 제일 먼저 수송을 해오느냐가 홍차 수입업자의 한 해 장사를 좌우하는 관건이었다. 그래서 신기술의 쾌속선 조선 경쟁이 치열했다. 그중의 하나가 현재도 남아 있는 범선(clipper class) 커티삭(Cutty Sark)이다. 커티삭은 현재 런던 동부 세계 자오선의 시발이 되는 그리니치 천문대 앞 템스 강변에 전시돼 있다. 노란색의 상표로 유명한 스카치 위스키 커티삭이 바로 이 배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의 중국산 홍차 사랑
 
당시로는 어느 배도 커티삭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마침 수에즈운하도 개통되어 중국에서 새로 추수된 차가 단 83일 만에 영국에 도착했다. 다른 쾌속선보다 무려 25일이 빨랐으며 지금의 기술로 봐도 놀라운 속도였다. 중국과 런던 사이가 바다로 거의 2만㎞이니 커티삭은 하루에 무려 240㎞, 즉 시속 10㎞로 항해했다는 뜻이다. 커티삭에 실린 중국차가 그리니치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런던에 퍼지면 영국 귀족과 상류층의 하인들은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사서 주인에게 달려갔다. 그날 저녁 런던에는 중국 햇차를 마시기 위한 파티가 여기저기에서 열리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영향력 있는 영국인들의 중국산 물품에 대한 수요는 높았고, 이를 영국은 귀한 은으로 지불해야 했기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부패한 중국 관리와 중국 상인들을 이용해 중국 시장에 팔았다. 우선은 전국 각지에 마약굴을 설치해 무료로 중국인들이 맛을 들이게 했다. 원래 아편은 마취 용도로 이용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처음부터 쾌락의 용도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의 밀수업자들을 통해 아편굴을 만들어 처음에는 공짜로 사용하게 만들어 중독의 길로 유도했다. 이런 아편굴이 베이징의 상류층 한량 남자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고 곧 이어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전국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797년 한 해에만 2371만㎏이라는 엄청난 양의 아편을 중국에 팔았다. 당시 중국 인구가 2억9510만명이었으니 중국인 1인당 79g의 아편을 소비했다는 통계다. 아편전쟁(1839~1860) 당시 중국 인구가 4억명이었는데 그중 1350만명, 즉 전체 인구의 3.3%가 중독자였다는 통계도 있다. 특히 중국 성인 남성의 27% 가 중독자였다고 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직전까지도 중국 전역에 마약 중독자가 전체 인구의 15%에 이르는 8000만명이었다는 통계도 있다.
 
결국 중국 정부는 이런 상황을 손놓고 두고 볼 수 없어 1719년, 1799년, 1814년, 1831년 수차례에 걸쳐 아편 사용을 불법화하고 단속했다. 그러나 아편의 이익이 워낙 높아 영국 동인도회사를 등에 업은 중국 밀수업자들은 지방 토호들과 관리들을 매수해 단속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결국 중국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광저우에 있던 영국 상인과 동인도회사의 아편 재고 2만 상자(154만㎏)라는 엄청난 양의 아편을 압수해 해변에서 태워버리는 극단의 조치를 취한다.
 
 
 
이익에 묻혀버린 양심의 소리들
 
한때 중국 정부와 영국 정부 사이에는 아편의 비도덕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아편 거래를 중단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양측 양해하에 아편 재고를 압수해 파기한 일도 있었다. 아편의 도덕성에 의문을 표하는 의견이 영국 언론과 하원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극소수 의견이었다. 당시 영국 동인도회사의 영향력은 영국 정부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적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당시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편 중독의 심각성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여왕에게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아편의 이익에 관련된 영국 중신들이 편지를 중간에서 가로채 전달을 안 한 것이다. 결국 막대한 이익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영국과 중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밀약으로 아편은 다시 유통되기 시작했고, 압수 파기한 물량(140만㎏)에 대한 배상 문제로 두 나라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결국 1839년 9월 4일 양국 해군 사이에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는 1839년 11월 3일 영국 정부가 보낸 정식 해군 선단이 마카오에 도착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압도적 무력에 밀린 청군은 대패하였고, 홍콩은 점령되었다. 영국은 홍콩을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전투는 계속되었으나, 청군은 당시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영국 해군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1842년 8월 29일 영국과 중국 사이에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이 체결되는데 내용은 일방적이었다. ‘1. 홍콩을 영국의 국토로 인정하고, 광저우, 샤먼, 푸젠, 닝보, 상하이 등을 개항한다. 2. 전쟁 배상금 1200만달러(현 시가 464억9000만달러·약 67조9219억원)와 아편 보상금 2100만달러(현 시가 813억달러·약 118조8582억원)’ 등이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편은 계속 문제가 되어 1856년 다시 2차 아편전쟁이 벌어진다. 그때는 프랑스를 비롯한 러시아, 미국까지 개입해 중국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패전한다. 결국 아편무역의 합법화, 영국인과 프랑스인의 중국 내 특권을 인정하고, 영국과 프랑스 물품의 수입세를 면제하는 1858년의 톈진조약을 중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약에는 유럽 선교사와 상인들의 중국 내 여행 특권도 들어 있었다. 이후 유럽인은 중국에서 치외법권 대상이었다. 이런 일련의 전쟁 패전과 불평등 조약 등으로 점철된 1839년부터 1945년까지를 지금도 중국인들은 ‘백년의 굴욕’이라고 부른다.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가진 영국에 비해 거의 중세 군대만을 보유하고 있던 중국은 상대가 안 되었다. 무력에서 밀린 중국은 불평등조약을 받아들였고 홍콩, 구룡반도 포기, 상하이 항구 개방, 불리한 무역 조건 감수라는 치욕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1차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내준 홍콩은 1997년에 가서야 156년 만에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뿐만 아니라 1860년 10월 6일 영국군이 원명원(Old Summer Palace)과 자금성(the Forbidden City)을 점령해 수일간 약탈한 사건을 두고도 중국인들은 지금도 치를 떤다. 당시 영국군이 두 궁궐에서 약탈해 온 수많은 물건들이 영국 시골 귀족들 저택에서 지금도 발견된다. 심지어는 비단 벽지도 뜯어 왔다. 이 벽지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영국령 건지섬에 지어진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저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이 멜론처럼 잘라졌다’
 
중국이 종이호랑이라는 사실을 재빨리 간파한 프랑스와 미국은 1843년, 러시아는 1858년 중국의 팔을 비틀어 난징조약과 비슷한 조약을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중국은 완전히 서양 열강들의 밥이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1850년과 1860년 사이에 서부와 북동부, 영국은 1876년 양쯔강 상류의 영향권에 대한 양해를 중국 정부로부터 얻어냈다. 이어 프랑스는 1884년 베트남에 대해, 1895년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 북동부에 대한 ‘영토 영향력의 양해(spheres of influence)’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내 해당 지역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했다. 결국 중국은 정말 종이호랑이가 되어 버렸다. 이를 두고 중국이 ‘멜론처럼(like a melon) 잘라졌다’고 역사가들은 표현한다.
 
영국이 아편전쟁 당시 주장한 것이 바로 자유무역이었다. 중국 입장에서 봐서는 철저히 영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무역이었지만, 당시 영국은 자신들의 압력을 자유무역이라는 말로 포장해 중국에 들이밀었다. 당시 중국은 유럽이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상품(비단, 차, 도자기)들이 넘쳐났지만 유럽으로부터 사올 것이 별로 없는, 항상 수출이 수입을 앞서는 출초(出超) 무역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당시 세계 최강의 영국에는 완전하게 무시되었다.
 
어찌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바로 힘의 원리이다. 1·2차 아편전쟁을 벌일 당시 영국의 주장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현재 미국 트럼프가 벌이고 있는 자국이익 우선주의 강요에도 감히 맞설 상대가 없어 보인다. 아편전쟁 때와 비슷한 상황이 거의 200년 만에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당시 영국이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영향력에 비하면 지금 미국의 그것은 비교가 안 될 정도이다. 그래도 미국이 마음먹고 덤비면 미국 시장의 크기가 워낙 커서 세계 어느 국가도 대적할 수가 없긴 하다. 
 
 
 
주간조선 권석하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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