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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79
트루빌의 해변/ 모네
The Beach at Trouville/ Claud Monet

 그림.JPG


사랑을 간직한 뚝심 

“미술(Art)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미술사 책으로 기록되고 있는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의 저자 곰브리치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바 있다. 패러디가 허용된다면 이렇게 중얼거리고 싶다. “그림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림장이들이 있을 뿐이다.” 다만 이 어설픈 서언(序言)은 인상파 이전까지만 통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림장이란 물론 화가를 낮추어 표현하는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란 말, 그림장이라는 말은 왠지 그림을 그리는 기술만을 겨냥해서 부르는 용어같이 느껴진다. 오늘날의 화가들에게 과연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가당 키나 한 것일까? 오! 노!, 오늘날의 화가들은 그림을 통해 생각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림장이라는 표현을 종식시켜버린 인류미술사의 가장 잔인했던 혁명가들은 단연 ‘인상파’일 것이다. 이 이웃나라 혁명가들의 그림은 비교적 늦게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입성하게 되었다. 19세기 내셔널갤러리가 당대의 외국화가 작품들을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영국인들다운 조심스러움과 더불어 당대의 예술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인상파 작품들은 휴 레인(1875~1915)의 사후 유증품으로 내셔널갤러리에 입성하게 되었다. 혁명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모네(1840~1926)의 그림 가운데 빛나는 소품의 한 점으로 소개하고 싶은 것이 바로 ‘트루빌의 해변(1870)’이다. 
인상파의 그림을 옳게 감상하기 어렵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만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첫째, 외부적인 요인이다. 인상파 이후 급변해 버린 미술사의 속도감 때문이다. 예술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새로움’에 인류미술이 심하게 집착하게 되는 직접적 촉매제가 된 것이 인상파다. 인류미술이 내용보다 특히 형식의 새로움에 집착하게 되면서, 고정관념을 쪼개어버린 인상파의 혁명성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인상파 이후의 미술은 확장되고 급발전하였다. 둘째, 내부적인 요인이다. 우리는 너무 정확하게 일목요연하게 알려고만 하는 경향이 승하다. 미술사의 조류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미술을 보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일 텐데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객관식교육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까? 모든 것에 확실한 정답이 존재한다고 믿는 교조주의. 좀더 릴렉스하게 느슨하게 미술을 바라보라고 권하고 싶다. 미술은 수학시험이 아니다. 미술은 언제나 애써 모호하게, 애매모호하게 바라볼 일이다. 
이 소품은 모네, 드가, 르느와르, 피사로 등의 프랑스 젊은 화가들이 살롱의 권위에 대항하듯 전시회를 갖고 그 가운데 모네의 ‘해돋이(1872)’라는 그림에서 ‘인상파’라는 빈정거림의 비평을 갖기 이전인 1870년의 그림이다. 따라서 인상파라는 어설픈 이름이 작명되기 전에 그린 모네의 쟁쟁한 초기 걸작의 한 점이다. 이 그림이 당당해 보이는 것은 모네의 실험이 극도로 진행된 그림이기 때문이다.
모네가 부인 까미유, 세살배기 아들, 그리고 모네의 실질적인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선배 화가 외젠부댕 부부와 함께 바닷가로 여행을 가서 그린 그림이다. 왼쪽의 밝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까미유며 오른쪽의 짙은 드레스 여인은 부댕 부인이다. 가운데 빈 의자에는 아들 것으로 추정되는 신발이 걸려 있다. 구름은 빨리 움직이고 있는 듯 하다.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바람의 속도를 잡기 위하여 빠른 붓놀림으로 그려진 듯 하다. 두터운 붓을 사용한 모양이다. 다분히 투박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세부 묘사보다는 전체의 균형을 생각하게 하는데, 당시로서는 새로움이었을 어색하게 잘려진 화면의 폭이 돋보인다. 어색하고 특이한 구성, 군데 군데 칠하지 않고 비워둔, 그러나 주변 색으로 인하여 충분히 그 역할을 해 내는 여백들, 투박함과 어색한 구도 속에서도 놀랍도록 안정감을 주는 전체적 색감 등은 이 그림을 빛나게 하는 모네의 고감도 새로운 테크닉들이다. 거친 바닷가의 현장감이 느껴지도록 그림의 표면에 그대로 붙어 있는 바닷가의 모래알들, 하얀 색으로 개칠된 거친 하일라이트들도 그렇다. 이런 화가의 새로운 기법이 주는 충격은 한마디로, ‘화가란 그림장이가 아니다’라는 항변이었을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빛이 주는 사물의 변화는 결국 화가의 주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그림은 허구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충실한 외광파(外光派)였던 모네의 이 현장감 넘치는 그림은 그런 주관을 향한 빛과의 싸움이었던 셈이다. 빛은 시간을 의미하며, 눈을 의미하며, 결국 미술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모네가 풍기는 선지선(善之善)은 뚝심이다. 혹평과 비난에 끄덕하지 않았던 그의 화폭은, 현대미술의 감성을 스스로 눈 뜨도록 만든 ‘갸륵한 노고’에 해당한다. 그 갸륵한 노고를 느끼기에 이 그림은 너무도 충분한 소품이다. 바람과 구름과 바다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담아낸, 모네의 열정과 사랑이 어떻게 뚝심이 되어야 했는지를 진술하고 있는 생생한 증인의 하나다. 모든 사랑에는 뚝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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