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나는 런던-55
비너스의 몸단장(록비 비너스)/ 벨라스케스
The Toilet of Venus (the Rokeby Venus)/ Diego Velazquez)
드러냄의 위생학에 대하여
런던의 관광지였던 레이몬드쇼(Raymond Revuebar)를 기억하고 있다. 런던의 환락가 소호(soho)에서도 가장 화려한 누드쇼였는데, 영국 포르노산업의 대부였던 폴레이몬드가 만든 그 극장의 맨 앞자리는 주로 일본 관광객들의 몫이었다. 그들이 돈을 한 움큼 더 주고서라도 굳이 앞자리를 고집한 이유는 족히 짐작할 만 하다. 잘 보고 싶어서, 그래, 배불리 잘 보고 싶어서… 육 년 전 문을 닫은 그 극장처럼 굳이 앞자리를 고집할 필요가 없는 것이 내셔널갤러리의 가장 유명한 누드화 ‘록비비너스(1647~51)’다. (요크셔의 록비파크에 걸려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벨라스케스(1599~1660)라는 스페인 거장의 유일한 누드화로 남은 이 그림은 어느 각도에서건 레이몬드쇼의 일등석을 연상시키는 마력이 있다. 아뿔사, 누구나 일등석에 앉혀주는 맘씨 좋은 이 아가씨는 신화 속의 미인, 황홀한, 바로 비너스다. 그리고 변명해야 한다면, 내가 이 그림을 보면서 그만 천박한 본성을 드러내고 레이몬드쇼를 떠올리는 것은, 전적으로 이 그림을 휘적거린 천재 벨라스케스의 빛나는 솜씨 탓이다. 종교적인 또는 다른 이유로 누드화가 금기시되었던 당시의 스페인미술에서 벨라스케스는 몇 점의 여성 누드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그림 한 점 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또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한 점인 이 그림의 비너스는 그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히프선이 다분히 현실적이며 섬뜩할 정도로 에로틱하다는 측면에서 벨라스케스의 현실감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화로 존재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티치아노나 조르조네 같은 화가들의 비너스와 비교하여 이 그림이 현실적인 이유는 그 몸매의 날카로운 직관에 있다고 본다. 르네상스가 추구한 인체의 미에 대한 표현은 그리스 예술, 즉 그리스 조각의 표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나친 풍만함이나 어색한 몸의 비례는 고대 그리스의 미의 기준이 아마도 오늘날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오래된 답습을 현실감으로 뒤바꿔버린 그림의 한 점인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그림의 제일 존재가치다. 어디서건 레이몬드쇼의 일등석 같은 일급 전망을 감상할 수 있는 이 그림의 매력은 첫째, 바로 그 현실감 넘치는, 오늘날의 기준에도 맞아 떨어지는 몸매의 근사함에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능숙한 각도로 표현한 기막힌 구도에 있다. 목욕 후 침대에 팔을 괴고 누운 비너스의 야릇한 자세를 집중적으로 간파한 벨라스케스의 놀라운 구도감각에, 고백컨데 남자로서의 나는 정신이 혼미해진 경험이 수두룩하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미적 양심과 실력을 존경하게 만들기에 충분한데……
이 그림의 결정적 실수, 비과학적인 터무니없는 표현으로 지적되어 온,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 속의 얼굴은 벨라스케스답게 뿌옇게 처리하고 있다. 상상력의 고삐를 튼 것이다. 도저히 보일 수 없는 각도의 얼굴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걸 벨라스케스가 감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미 삼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어두운 침대보가 추구하고 있는 뽀얀 피부색의 우아한 드러냄, 드리워진 커튼마저 숨막히게 하는 그 드러냄은 신랄함으로 이어진다. 그 신랄함은 이 그림의 잔인한 숙명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14년 메리라는 캐나다 출신의 여성참정론자(Suffragette)가 무방비상태의 이 그림을 난도질해버린다. 그녀는 여성참정론의 리더였던 팬커스트부인(Mrs. Pankhust)을 억압하는 정부에 대한 반항으로, 즉 미를 억압하는 정부에 대한 반항으로 미의 상징 비너스를 파괴시키려고 하였다. 참담하게 찢겨진 비너스의 나신은 내셔널갤러리의 그림 보수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여성참정권 신장에 일조한 나라 영국의 상징적 전통이 되어버렸다. 한 화가의 드러냄의 상상력은 이렇듯 실로 위대한 것이다.
예술의 한 장면으로서의 누드까지도 터부시해온 대한민국의 공중파는 심히 비위생적이다. 상상력의 권리를 박탈하는 그 유구한 전통은 유교전통보다도 독재전통이 주도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오늘날까지도 공중파에서 헤어 누드가 터부시된다면 그것은 아직도 존재하는 독재의 잔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인터넷의 낯뜨거운 저질 누드를 온 국민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유독 공중파 티브이에서만 누드를 금기시한다는 것은 일종의 간악한 위선의 모습이다. 그런 근엄한 공중파를 지닌 나라가 왜 성범죄 발생률이 그 모양일까. 오백만 가지 밤문화가 존재하는 러브호텔의 천국에서 정작 티브이만이 언론의 정의라는 거짓 위선의 탈을 쓰고 예술적 상상력까지 틀어막고 있다. 프로야구와 룸쌀롱으로 다스린 독재정권이 씨 뿌린 국민정서가 오늘날까지도 국민들의 예술적 상상력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이다.
때로는 가리는 것이 더 수치스러운 것이다. 감춘다는 것은 스스로가 비위생적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림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함께 묶였던 우리의 비위생적 집단무의식을 이제는 날려버려야 할 때라는 깨달음이다. 치열한 예술적 상상력이 조용히 가라앉으면 사회정의도 되고 사회자정력도 될 것이라는 선한 믿음이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자정력으로 버틸만한 자랑스러운 존재들이라는 자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