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눈을 뜰 때 절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 인물과 일치할 수 없음에서 오는 영적 거리감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갈라디아서 3장 7절 말씀이 공허하게 다가왔습니다. 신앙과 세상이 별반 다르지 않음에 대한 영적 괴리감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론과 실제의 삶이 다릅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명시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헌법으로는 개인을 위해 국가는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의미지만 실제의 삶은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했던 역사를 경험 있습니다. 헌법의 명시와 실제의 삶이 다르듯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실제의 영적 생활에도 그러한 괴리감이 있음이 느껴지는 시절이었기에 절망적인 구간의 삶을 살았습니다.
고민은 대체로 두 가지 결론을 만들어 냅니다. 고민함으로 더 깊이 연구하여 그것을 결국은 사랑하게 되어 일치하게 되는 효과가 있게 하는 촉진제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고민함으로 미워지고 멀어지게 되는 현상입니다. 젊은 시절 이러한 영적 양극화에 대한 고민은 깊어졌습니다. 성경으로부터 멀어 질 것인가? 아니면 성경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고민을 사랑하고 끌어안아서 말씀에서 약속한 것을 이루어지는 삶을 살 것인가였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읽고 있던 성경을 갈기갈기 찢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찢긴 성경에 불이 붙기를 바랐습니다.
그 옛날 시내산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던 현장을 막연하게 사모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찢은 행위자에게 벌이 내려질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안타까운 것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기대했던 두 가지 일들은 내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찢긴 성경이 있는 골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며 심적, 영적 방황을 했습니다. 산에 올라 간절히 기도할 때 갑자기 소낙비가 내렸습니다. 그 비를 온몸으로 맞았습니다. 그 비는 치유의 물이었습니다. 찢긴 성경은 마음에서 다시 원점으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내용이 공허한 종교적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이뤄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임이 느껴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내용은 내 인생을 향해 직접 약속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영적 괴리감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개역한글성경에는 “복의 근원”으로 해석했습니다. 개역개정은 “너는 복이 될지라” 원문의 내용으로 수정 번역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이 내 인생에 임한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복은 아브라함 개인만을 위함이 아니라 옴니버스 복입니다. 옴니버스 Omnibus 란 라틴어로 '모든 이를 위한'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복이란 무엇인가를 가진 것에 관한 결과를 일컫습니다. 소유가 곧 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일반상식입니다. 그래서 많이 가진 자를 일컬어 복 받은 자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진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이며 관계입니다. 소유는 존재와 관계로부터 온 그림자에 불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아브라함 존재 자체가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적인 욕망을 위해 많은 것을 소유함이 아니었습니다. 복의 시작은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은 곧 복의 시작입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을 지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잘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잘 사는 것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주어진 세상과 삶을 경영하는 거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복의 원뜻은 ‘바로크’입니다. 소유함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 자체가 복이 되게 하셨고 또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의 수원지가 되게 하셔서 그의 자손이 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옴니버스 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영혼의 자유는 물질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주어진 물질을 나누는 것에 영혼의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쌓아 놓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누는 것이 복의근원이며 하나님이 주신 복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다윗은 복을 소유한 사람에 대해 3가지로 정의 내렸습니다. 악인의 꾀를 분별하여 그것에 영향받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길을 판단하여 그 길을 함께 걷지 않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를 알아서 그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고 연구한 결과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음은 종교적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이 정체성이 되는 것이 복입니다.
이러한 복된 삶에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것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인생은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와 같습니다. 가지의 생명은 원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원 나무에 붙어 있어야 가지는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가지는 나무를 떠나서는 죽은 그 자체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가지에 맺혀진 열매를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원복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사람들의 삶은 소유함보다 존재에 만족하고 소유한 것을 나누는 옴니버스 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무엇을 얼마만큼 쌓아둔 소유가 아닌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맺으며 소유한 것을 나누는 삶이 성경에서 말하는 옴니버스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