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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필리버스터filibuster와 줄넘기 요정

hherald 2016.03.07 18:29 조회 수 : 1121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으려는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가 세계 기록을 세웠다. 단일 사안에 대한 최장 시간 필리버스터는 캐나다 신민주당 의원들의 58시간이었는데 지난달 27일 밤 이미 100시간을 넘겼을 때 AP 통신 등은 한국의 필리버스터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기록이 됐다고 보도했다.

 

필리버스터란 스페인어로 해적이라는 뜻인데 의회에서 다수당이 수적 우세로 법안이나 정책을 통과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소수당이 표결을 방해하는 정치적 의미로 사용돼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행위'를 뜻한다. 이번 한국 야당 의원들이 한 무제한 토론 외에도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행위'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시간을 끈다는 의미에서 같은 질문을 계속하거나, 표결하러 나가면서 아주 천천히 걸어가거나, 다른 법안을 계속 제출해 쟁점 법안의 심의를 늦추는 방법 등이 있다. 그래서 이번 무제한 토론을 그냥 필리버스터라 하는데 사실은 필리버스터의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우리 국회사에 유명한 무제한 토론 필리버스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례다. 1964년 4월 21일 임시국회 때 자유민주당의 김준연 의원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으려 5시간 19분 동안 원고 없이 쉬지 않고 발언해 임시국회 회기가 마감되고 체포동의안 처리가 무산됐다. 5시간 넘게 원고 없이 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한국은 의제와 관계없는 얘기로 시간을 끌 수 없다. 미국은 된다. 그래서 성격을 읽거나 전화번호부나 요리책을 읽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실제 30쪽이 넘어가는 속기록 내용을 보면 필리버스터를 위해 엉뚱한 내용으로 시간만 끈 것이 아니라, 주제 안에서만 5시간 동안 연설을 이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국회사에는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인 버니 샌더스 연방 상원의원이 있다. 2010년 12월 10일 부유층에 대한 세금 감면 연장안을 막기 위해 8시간 37분동안 연설을 했다. 이 필리버스터로 샌더스는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렸고, 연설 내용은 책으로도 출간됐다.

 

이번에 22번째 주자로 나온 권은희 국민의당 의원은 <줄넘기 요정>이라는 영국의 동화를 인용해 지금 한국의 현실과 빗대 말했다. 엘리너 파전이 1937년에 쓴 줄넘기 요정.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면 줄넘기가 오직 낙인 가난한 마을 소녀들 중 줄넘기 신동인 일곱 살 엘시는 케번산에 사는 줄넘기 요정들의 수제자가 돼 온갖 기술(거미줄 위에서도 줄넘기를 한다)을 다 익히지만 몸이 자라 요정 줄넘기를 쓸 수 없어 전설로만 기억된다. 새로 온 영주는 케번산에 공장을 세우려 하고 이를 막으려는 마을 여자들과 영주는 릴레이 줄넘기가 끝나면 공사를 한다는 소위 줄넘기 대결을 한다. 영주의 생각은 니들이 해봐야 얼마나 가겠느냐. 마을 여자들은 열심히 릴레이 줄넘기를 하고 한 명씩 줄이 발에 걸려 물러났다. 마지막 주자가 끝나자 왕년의 신동 엘사가 등장한다. 너무 늙어 다시 어린이의 몸처럼 작게 줄어든 엘사가 요정 신공으로 줄넘기를 계속하자 초조해진 영주. 그는 공사를 강행하며 엘사를 해코지하려 땅속까지 따라갔다가 엘사만 줄넘기 신공으로 나오고 영주는 영원히 나오지 못한다는 얘기다.

 

권 의원은 릴레이 줄넘기를 하는 마을 여자들과 릴레이 토론을 하는 야당 의원을 비유하며 국민이 마지막에 등장한 엘사가 돼달라고 했다. 국민이 힘을 가진 영주의 무자비한 횡포를 막아달라는 뜻이다.

필리버스터와 줄넘기 요정. 엘사를 도와주었던 그 시절 줄넘기 요정들은 착한 국민에게만 나타나는 것일까. 요정이 없는 시대. 한국 국회에서 나온 요정의 동화가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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