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헤럴드 단상

 

그라피티 graffiti 를 예술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그냥 낙서라고 생각하시는지. 갈수록 장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대 예술에서 예술과 낙서의 경계가 아직 있을까. 누가 했느냐에 따라 낙서가 되기도 하고 예술이 되기도 한다면. 영국 남쪽 휴양지 브라이튼 골목 벽에 그려진 그 많은 그라피티를 볼 때마다 나는 그림을 참 잘 그렸다는 거도 그렇거니와 몇몇 그림에 담긴 기발한 상상력에 놀라곤 한다. 낙서와 예술의 경계가 내겐 어렵다.

 

 

‘사요나라 박근혜’라는 그라피티를 그린 홍승희 씨가 2심 재판에서 ‘재물손괴죄’로 150만 원 벌금형을 받았다는 소식이다. 1심에서 무죄였는데. ‘사요나라 박근혜’는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오른손을 들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홍익대학교 공사장 가벽(펜스)에 그렸는데 이곳은 다른 그라피티도 많이 있다. 홍대 가벽은 그라피티의 성지라고들 한다. 그래서 지금도 욕설이 섞인 그라피티까지 버젓이 있다. 그런데 다른 그라피티는 문제가 안 되고 박근혜를 비판한 그라피티만 문제 삼았다. ‘재물손괴죄’가 적용됐다. 피해자가 신고도 안 했는데 검찰이 가벽 주인을 찾아가 일부러 문제로 삼았기에 타깃으로 했다는 느낌이 진하다. 홍승희 씨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에 대항해 피켓을 들었던 대한민국효녀연합의 홍승희, 그 사람이다.

 

 

물론 그라피티는 불법이요, 범죄다. 소유자의 허락 없이 벽에 몰래 그려진 낙서는 처벌의 대상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사회,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을 보는 것이 불편한 일이다. 70년대 담벼락에 '00와 XX는 연애한다'거나 '00 오줌쌌다'고 쓴 낙서처럼 그것을 보고 싶지 않은, 또는 알고 싶지 않은 이들의 권리를 무시한 것과 같다. 그라피티를 그린 사람은 그 그림 속에 전하려는 심오한 메시지가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을 모르는 대부분의 관찰자에게 그것은 지저분한 낙서가 된다.
뉴욕에서는 그라피티를 없앴더니 범죄가 감소한 결과도 나왔다. 하긴 뉴욕의 그라피티는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갱단이 제 구역을 알리는 표시로 사용되기도 했으니. 깨진 유리창 이론 Broken Window Theory 이라고 그라피티를 방치하면 그곳을 중심으로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구나, 하는 심리가 번져 범죄가 퍼진다는 논리에 따라 뉴욕의 그라피티를 다 지웠더니 범죄가 현저히 줄었다. 특히 뉴욕 지하철은 밤이 되면 대놓고 우범지역이 되는데 낙서가 없어지니 안전한 곳이 되었다고 한다.

 

 

다 부정적인 건 아니다. 대중에 전시되는 그라피티, 대우받는 예술작품이 된 그라피티도 많고 하나의 문화로 영향력 있는 작가도 많다. 영국의 거리예술가 뱅크시 Banksy 의 작품은 예술품으로 고가에 팔리고, 프랑스 그래피티 아티스트 제우스 ZEVS 는 2016년 세계기후협회의 작가로 선정됐고, 뉴욕 출신 존원 Jonone 은 2015년 ‘레지옹 도뇌르’ 문화/예술 부문 훈장을 받았다.

 

 

다시 이번 사건을 보자. 홍대 공사장의 펜스에는 수많은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다. 유독 홍승희 씨의 그림만 지워졌다. 경찰이 공사하는 회사에 찾아갔다. 회사 측에다 그렇게 진술해 주기를 요청하고 홍 씨에게 재물손괴죄를 적용했다. 다른 그림에는 그런 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재물손괴죄라면 홍대 공사장의 펜스에 그려진 모든 그라피티에 다 적용돼야 하는데. ‘사요나라 박근혜’에만 적용된 건 악의적인 법 적용 아닐까.

법으로 꼼수를 부리는 우리나라 검찰의 모습을 그린다면 역시나 딱 그라피티 급이다. 예술과 낙서의 경계가 이래서 모호하다.

 

헤럴드 김 종백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582 테이트 모던에서 욱일기를 내리자 hherald 2024.03.25
581 테이트 모던의 욱일기, 모두 항의합시다 hherald 2024.03.18
580 노욕 老慾 hherald 2024.03.11
579 이주移住와 이주민, 그리고 능동적 이주자 hherald 2024.03.04
578 회색 gray 이혼, 황혼 黃昏 이혼 hherald 2024.02.26
577 뉴몰든의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hherald 2024.02.22
576 영국 한인사회의 따뜻하고 풍성한 설 hherald 2024.02.12
575 부자富者 될 관상觀相이 있다굽쇼? hherald 2024.02.05
574 재영한인사회의 집단지성 集團知性 hherald 2024.01.22
573 새해에는 푸른 '청靑'의 기운이 가득하길 hherald 2024.01.15
572 35대 재영한인총연합회의 수준은 어디까지? hherald 2024.01.08
571 코스트코에서 금괴 金塊를 판다 hherald 2023.12.18
570 노인회 어르신들의 캐럴송 선물 hherald 2023.12.11
569 한인회비는 한인회장 퇴직금이 아니다 hherald 2023.12.04
568 매표하는 삼류 선거, 부추기는 삼류 어른들 hherald 2023.11.20
567 찰스 국왕의 한인타운 방문, 들러리가 된 주인공들 hherald 2023.11.13
566 이한응 공사 순국지에 부착된 동판 hherald 2023.11.06
565 킹스턴의 김치의 날, 2023 김치 페스티발 hherald 2023.10.23
564 한인회 정관 1장 3조 '본회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hherald 2023.10.16
563 그해 10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제6호실 hherald 2023.10.09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