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움직이는 한 마리 붓
화가는 표현하는 기계가 아니라 표현하는 동물이라는 진리 아래에서 우리 감동의 폭은 확장된다. 감정과 사고를 지닌 화가들의 표현법을 우리는 테크닉이라고 부른다. 테크닉은 따라서 유사성과 이질감을 함께 지니는 화가들만의 특권을 부르는 용어다. 그 특권, 테크닉 절정의 대가 루벤스(1577~1640)는 감탄과 찬사의 언저리에 사는 역사상 가장 웅장했던 테크니션의 한명이다. 그의 거침없는 필력은 우아함과 유장함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의 장중한 색채감각은 신화와 역사를 재현하는 인간들의 모범동화 한편이다. 그의 표현법들은 그림 속 하나의 완성을 수행한 인류의 진지한 경험의 모델이다. 다산작가의 대명사인 그는 여러 장르의 수많은 그림을 남긴 대가여서, 그의 진면목을 경험하고 싶다면 신화나 역사의 소재를 다룬 그의 대작들을 감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루벤스 테크닉의 한 단면을 시쳇말로 ‘엣지있게’ 보고 싶다면 내셔널갤러리의 히로인 중 하나인 “수잔나 초상화(1622~1625추정)”를 보는 것이 유력한 방법의 하나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슈퍼스타급 초상화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밀짚모자”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불려 왔다. 몇 가지 곡절이 추정된다. 불어 타이틀 ‘Le Chapeau de Paille(Straw Hat)’의 paille가 펠트를 의미하는 ‘poil’의 오타였을 것이라는 추정과, 영국 로열아카데미의 초대 회장을 지냈던 화가 죠슈아 레이놀드가 이 그림을 ‘Straw Hat’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는 추정 등이 그것이다. 어떤 연유이건 이 그림 앞에 서면 ‘백문불여일견’이라는 옛말을 피부 넓게 절감하게 된다. 그렇다, 애초부터 이 세상에 ‘루벤스의 밀짚모자’라는 그림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펠트모자나 빌로드모자가 존재했을 뿐. 그걸 확인하는 재미는 뜻밖에 쏠쏠하다. 이 세상에 대한 오해 하나를 풀어버리는 쾌감이 척추 짜릿하게 비명 지른다. 아, ^^!. 그리고 그동안 오해해 왔던 이 수잔나라는 여인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고개를 치켜 올린다. 수잔나는 루벤스의 두번째 부인의 언니였다. 그녀가 두번째 결혼을 한 것이 1622년이어서 아마도 결혼 즈음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바로 설레임과 미래에의 설계로 흥분된 시절의 모습일 것이다.
먼저 야외배경 초상화의 붐을 일으킨 이 그림의 먹구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머리를 휘감은듯한 먹구름들은 루벤스식 지극히 인위적이면서도 우아한 표정으로 흩날리고 있다. 루벤스식 번짐과 루벤스식 굴림이라는 테크닉이 신비하게 얼굴을 감싸고 있다. 그녀의 우유 빛 피부는 보는 이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킬 만큼 상당히 매력적이다. 지나치게 올라와 있는 듯한 그녀의 가슴은 투명한 물고기를 연상시킬 만큼 생명력이 느껴진다. 루벤스식 뭉개기 테크닉의 효과다. 수잔나의 다른 초상에서도 확인되는 그녀의 화살표 코는 루벤스식 튕기기 테크닉의 산물이다. 루벤스의 붓질은 그 경로가 훤히 보이는 움직임이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붓이 스스로 그려낸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보여주듯, 처음부터 끝까지 붓은 힘과 리듬감을 지닌 채 헤엄치고 있다. 마치 한번도 쉬지 않고, 한번도 멈추지 않고 움직인 붓 놀림처럼. 강하게 드러나는 붉은 소매는 그 살아 움직이는 붓의 경쾌함이 꿈틀거리며 형성한 궤적 같은 느낌을 준다. 절대 중언부언하지 않는 날렵하고 노련한 살아 있는 붓의 움직임. 루벤스식 과장 테크닉으로 약간 더 크게 묘사한 눈과 눈동자에서는 그 살아있는 붓만의 엄숙한 노하우가 느껴지는 듯 하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별 대단함을 못 느끼겠다는 분들을 위해 제안한다. 이 그림의 놀라운 비밀 하나를 발견하기 위한 제안이다. 먼저 배경의 먹구름을 집중적으로 약 이삼 분간 바라본다. 그리고 수잔나의 얼굴을 직시한다. 보이지 않는가. 야외에서 발생하는 모자챙 밑의 옅은 그림자 아래 드러나는 기미와 잡티! (에궁, 그녀는 도대체 어떤 화장품을 썼단 말인가?) 아직 놀라워하기는 이르다. 기미와 잡티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우수와 애환의 편린 같은 것들!… 보이는가. 놀랍지 않은가. 결혼 즈음의 기쁜 모델 표정 속에서 우수와 애환을 함께 잡아낸 살아 있는 붓의 경이로운 기적 말이다. 인간은 기쁜 순간에도 가슴 속 저 한구석에 우수와 애환을 함께 지닌 채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여우 같은 루벤스의 통찰력, 그리고 그가 키우는 살아 있는 한 마리 붓의 징그러운 움직임 말이다. 펠트모자를 장식한 깃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라는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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