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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얼마 전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독립운동가 안원생 선생의 유해 봉환 소식이 들렸다.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흥사단과 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하다 미국에서 사망했다.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해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 영국군과 합동작전 통역관을 했고, 한국광복군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참가해 무장투쟁도 했다. 문무를 겸비했던 독립운동가였다고 할까. 언제 사망했는지 몰랐는데 지난해 미국에서 묘소가 발견돼 올해 광복절을 앞두고 한국 정부가 유해 봉환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가 영국과 관련 있는 축구선수였다는 점이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1930년 전후 중국 축구계는 안원생에 대해 "뛰어난 체력과 강한 근성을 가진 전방 공격수"라고 묘사하며 중국 국적이 없는데도 그를 중국대표팀으로 선발했다. 축구선수로서 그의 꿈은 종주국인 영국 무대를 밟아보는 것이었다. 그런 기회가 있었다. 1930년, 그가 소속된 중국아마추어축구대표팀은 영국체육회의 지원으로 인도네시아와 경기를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유럽 순회경기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광복군과 영국군이 연합해 인도·미얀마 지구에서 활동하던 1943년, 광복군 총사령부는 그를 영국대사관 정보처에 파견해 독립운동의 성과를 올리게 했다. 스포츠 무대에서는 아쉽게 불발했지만, 독립운동 무대에서는 영국과 함께했다.

 

안원생은 해방 뒤 대한축구협회에 몸담았다. 아마도 독립운동가이면서 한국 체육 선구자로 불리는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했을 것이다. 여운형은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하면서 육상, 야구, 축구에 능했다고 한다. 스포츠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상하이에서 야구 구경 갔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됐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한국이 태극기를 들고 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이가 여운형인데 광복 후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취임해 조선 체육을 총지휘했다.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은 당시 정부 수립 전으로 미군정 체제였지만, 독립국 지위를 인정받고 출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했다. 런던올림픽은 손기정이 태극기를 들고 기수로 입장했다.

 

그는 정작 런던올림픽을 보지 못했는데 1947년 7월 19일 조선체육회 주최로 ‘세계올림픽 참가 기념 경기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때마침 인천에 입항한 영국함대팀과 서울축구단의 축구 경기가 하이라이트였다. 여운형은 이날 오후 4시에 열릴 축구 경기를 보려고 이동하던 중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날 경기에서 서울축구단이 6대0으로 영국함대팀에 대승했지만, 그는 이 경기를 보지 못했다.

 

스포츠를 사랑했던 두 독립운동가의 영국 관련 스토리를 간추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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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코리아타운의 마지막 신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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