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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영국에서는 공인의 생명을 쉽게 끊을 수 있는 논제 세 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 논제는 아무리 좋은 쪽으로 옹호해도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궁지에 몰리기 십상이다. 즉 반유대인 언행, 히틀러 나치 옹호, 그리고 최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옹호가 바로 그것인데, 영국의 공인이라면 적어도 영국 사회 내에서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지난 4월 22일 자 영국 언론에 ‘당신은 너무나도 분명히 유대인으로 보입니다(You are quite openly Jewish)’라는 지극히 자극적인 문구를 표제로 한 기사가 등장해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일부 보수 언론은 표지 전체를 이 기사 하나로 다루었고, 다른 언론도 거의 예외 없이 대서특필했다. 기사에 따르면 런던 경시청 소속 현직 경관이 공개 장소에서 반유대주의에 가득 찬 듯한 이런 말을 유대인에게 내뱉었을 뿐 아니라, 뒤를 이어 다른 경관이 유대인으로 지목된 사람에게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위협을 가했다는 것이다. 언론 특히 보수 언론은 좋은 건수 하나를 잡았다는 듯 평소에 친절하고 정중한 런던 보비(Bobby·영국 경찰의 애칭)가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고 난리를 쳤다.
 
 
친팔레스타인 시위대를 가로지르려 한 유대인
 
사건은 그 전주 토요일인 4월 13일 런던 시내 중심가에서 일어난 언쟁이 발단이었다. 가자지구 전투 종식을 요구하는 친팔레스타인 시위대가 행진하고 있는 대로를 시민 한 명이 건너가려고 하자 그걸 경찰이 막아서면서 일이 벌어졌다. 문제는 시민이 그냥 일반인이 아니라 영국 유대인 관련 단체인 ‘반유대주의 반대 운동(Campaign Against Antisemitism·CAA)’ 대표 기데온 팔터였다는 데 있었다. 당시 현장에는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공격으로 시작된 가자지구 전쟁의 종식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대가 행진하고 있었다. 20만명에 이르는 이 친팔레스타인 시위대는 요즘 2주에 한 번꼴로 런던 중심 트라팔가광장과 영국 의사당이 있는 팔러먼트광장 사이를 행진하고 있다.
 
런던에서의 거의 모든 시위는 토요일에 트라팔가광장에서 모여 정부기관이 즐비한 화이트홀 대로와 의사당이 있는 팔러먼트광장까지 이어지는 게 보통이다. 총리 관저가 있는 다우닝가 골목길이 중간에 있어 그 앞을 지날 때 시위대는 고함을 지른다. 사건이 벌어진 날도 대규모 행진이 차도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대로 양쪽 인도를 경찰이 에워싸고 있었다. 관례상 시위 행진이 이어지는 동안 경찰은 행인들의 차도 진입을 막는다. 행인이 행진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혹시 과격분자들이 시위대를 해칠 수도 있어서다.
 
언쟁은 팔터 대표가 시위대열 중간을 가로질러 건너가려고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서면서 일어났다. 당연히 경관은 팔터를 막았다. 그건 팔터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행인들에게도 해당하는 조치였다. 그런데 팔터는 경관의 저지를 몸으로 밀면서 차도로 내려오려고 했고 그래서 상당 시간(13분간) 논쟁이 오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한두 마디가 오갔다. 경관은 팔터가 유대인 특유의 모자인 키파를 쓰고 있는 데 특히 유의했다. 누가 봐도 유대인이 분명한 팔터가 반이스라엘 성향의 시위대 중간을 가로질러 갈 때 소란이 일어나면서 시위대가 팔터를 해칠 우려가 분명 있었다. 결국 팔터는 길을 건너가지 못했고 그렇게 해서 사건은 종료되는 듯했다.
 
경찰의 인종차별적 언행이 부각된 55초짜리 동영상    
 
그러나 사건 후 거의 1주일도 더 지난 4월 22일 CAA의 55초짜리 동영상이 공개됐고 영국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큰 사건으로 번졌다. 문제는 13분간의 상당히 긴 논쟁을 거두절미하고 CAA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단 55초로 내용을 잘라 발표한 데 있었다. 그 55초의 동영상에는 “당신은 너무나도 분명히 유대인으로 보입니다” “권유를 따르지 않으면 체포하겠습니다”라는 발언이 나온다. 단순히 길을 건너려는 시민을 가로막고 한 이 발언만 보면 경찰의 언행은 대단히 인종차별적이고 고압적이다. 영국 언론은 이 55초짜리 동영상만을 보고 런던 경시청 경관들이 모두 반유대주의자인 것처럼 몰아갔다. 그렇게 해서 리시 수낵 총리의 “경악할 일”이라는 발언부터 런던 경시청 통제 책임자인 사딕 칸 런던 시장의 “사태 파악을 해서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는 발언들이 터져나왔다. 당장 런던 경시청장의 목이 날아갈 것처럼 사태가 돌아갔다.
 
특히 극우 언론인 데일리메일은 “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What is this country coming to?) 유대인 한 사람이 폭도(mob)들을 자극할 것이 두려워서 자신의 나라에서 길을 건너는 것을 막는다니 말이다”라면서 “차라리 그것보다 경찰이 그를 공격하려는 자들을 체포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라고 흥분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분명 무슬림으로 보인다. 여기는 극우주의자 행진인데 나는 당신의 등장이 만들어낼 소란에 대해 걱정한다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물론 지난해 10월 가자지구 전투 이후 런던의 유대인들은 시내를 안전하게 다닐 수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수개월 전부터 런던 일부 지역은 유대인들이 다니면 안 되는 곳들이 생겼다. 특히 주말마다 친팔레스타인 시위가 벌어지는 트라팔가광장과 의사당이 있는 웨스트민스터 근처가 그렇다. 그런데 시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런던 경찰 입에서 그런 상상도 못할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나오자 유대인은 물론 일반 영국인들까지 격분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평소에는 반유대 관련 기사를 잘 쓰지 않던 진보 언론까지 런던 경시청 규탄 대열에 참여했다. 그러나 4월 24일 아침 스카이뉴스의 13분짜리 전체 동영상이 나오면서 사태는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전체 언쟁의 시작과 끝을 보면 사건은 단순히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처음부터 팔터는 촬영기사를 동행해서 사건을 고의로 만들어 갔고, 그걸 시작부터 끝까지 촬영했다. 그러나 언론에 발표할 때는 사건의 정황을 알 수 있는 앞뒤 부분을 모두 잘라내고 자극적인 문제의 55초만 제공했다. 사건을 인종차별적이고 고압적인 경관과 유대인이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몰고 가려는 목적이었다.
 
동영상 전체를 보면 경관은 13분 동안 초인적인 인내심을 갖고 팔터를 대한다. 그러면서 왜 길을 못 건너가게 막는지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준다. 그 과정에서 문제의 발언도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앞 뒤 내용을 모두 보면 경관의 발언은 결코 인종차별적 발언이 아니었다. 더가디언지가 ‘고의로 조작된 끈질긴 도발(tenaciously stage-managed a confrontation)’이라고 표현한 사건의 대화를 한번 들여다보자.
 
‘경관: 저는 당신이 거기에 제발 머물기를 요청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팔터: 나는 여기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시위대가 지나가는 대로 건너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나는 저기로 가기를 원합니다.
 
경관: 군중들이 가고 나면 저는 당신을 기꺼이 호위해서 떠나게 해드릴게요.
 
팔터: (차도로 내려서면서 경관을 몸으로 밀면서) 나는 지금 갈 겁니다.
 
경관: 안 됩니다, 선생님.(Sir·영국 경관은 대개의 경우 시민을 최고의 정중한 어법을 써서 Sir 라는 단어를 쓴다.)
 
팔터: 무슨 근거로? 나는 누구도 도발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냥 길을 건너가고 싶을 뿐입니다.
 
경관: (여기서 문제의 발언이 나온다) 선생님! 지금 당신은 너무나도 분명한 유대인으로 보입니다(You are quite openly Jewish). 여긴 친팔레스타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입니다. 나는 당신이 무얼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등장이 일으킬 상황에 대해 걱정할 뿐 입니다. 저기 지금 일단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보호하에 당신이 여기를 떠나서 어디로든 가면 됩니다. 그러나 당신이 여기에 있겠다고 선택한다면 주위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되고 그렇게 되면 저는 당신을 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팔터: 내가 여기에 머문다면 당신이 나를 체포할 겁니까?
 
경관: 왜냐하면 여기 당신의 모습이 대규모의 군중들을 자극해서 그들이 당신을 공격할 위험이 있고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들 모두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팔터: 그럼 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경관: (고개를 끄덕이며)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선생님, 당신은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와 친팔레스타인 시위대 한가운데로 혼자 결정해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 보고 그러지 말고 다른 곳으로 건너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도발을 하려고 하고 있고 그런 결정을 한 당신의 마음이 내게는 보입니다.
 
팔터: 내 마음의 결정? 내 마음의 결정은 나는 런던에 사는 유대인이고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관: 선생님 너무 그렇게 솔직하지 못하게 행동하지 마세요.
 
팔터: 나는 솔직하지 못한 게 아니라 어디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고 할 뿐입니다.
 
경관: 당신은 일부러 대열 중간을 뚫고 가로질러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대규모의 군중을 도발해 문제를 일으키려는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신을 공격하면 우리는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동영상에는 지나가던 시위대가 팔레스타인 깃발을 휘두르면서 ‘아동 살인자’ ‘쓰레기’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고 외치면서 팔터에게 대드는 듯한 고함소리도 같이 녹화되어 있다. 분명 팔터의 모습을 보고 시위대가 외치는 소리였다. 이때 경관들이 팔터를 에워싸기도 했다.
 
 
유대인 지도자의 도발이었음이 드러나다
 
이 사건이 이렇게 커진 데는 영국 사회의 금기를 경관이 건드렸다는 점이 분명 작용하고 있다. 물론 원론적으로나 현실적 측면에서 경찰의 행동은 틀린 점이 없다. 그런데도 영국의 모든 언론은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경관의 발언을 나무랐다. 우선 경찰의 단어 ‘완연한 유대인 모습(quite openly Jewish)’이 완전한 반유대식 어법이라는 지적이다. 안전하기로 유명한 런던에서 백주에 완연한 유대인 모습으로 다니는 일이 왜 문제인가 하는 논지다. 언론들의 주장은 영국 땅에서 완연한 유대인의 모습으로 다니든, 완연한 무슬림 모습으로 다니든 경찰이 관계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건너가려는 장소가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집회 한중간이었다고 하더라도 원칙으로는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경관이 유대인 지도자의 보행을 막으면 안 되었다는 뜻이다. 만일 유대인 지도자가 건너다가 군중들에 의해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개입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아주 원론적인 말이지만 이러한 지적 안에는 영국인이 시민들의 생활에 경찰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는 눈길을 엿볼 수 있다.
 
현장 근무 경관들의 판단으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해 이래라저래라 지시하거나 체포하겠다고 경고한 일은 분명 권한남용이고 고압적이었다는 뜻이다. 영국인들은 경찰을 비롯해 관공서가 사전에 시민의 안전이나 복지를 위해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는 걸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예컨대 특별한 위법을 하지 않고 정상 주행 중인 차량을 경찰이 음주 의심이 든다고 정지시키는 것을 금지할 정도로 영국법은 과도한 경찰의 권한을 경계한다. 경찰은 사전 예방이 목적이 아니라 사건이 터졌을 때 개입해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고 사전 안전조치를 위해 과도하게 간섭하는 행위는 경찰의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경찰이 사전에 예방 조치를 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사건보다는 경찰이 과도하게 시민 안전을 챙기려다가 생기는 시민의 자유를 더 걱정한다는 뜻이다.
 
영국인들은 국가권력이 시민 생활의 모든 면에서 사전 안전조치를 취해 규제를 해나가기 시작하면 결국 영국도 권위주의 국가, 더 나아가서는 경찰국가로 바뀐다는 걱정을 한다. 2024년 연말 전에 치러질 것으로 보이는 총선의 새로운 규정에 대해서도 지금 영국인들은 불만을 터뜨리는 판이다. 유권자들이 투표하려면 반드시 사진이 붙은 본인증명서를 지참해야 한다는 새로운 규정에 대해 자존심이 상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영국에는 신분증이 없다는 점이다. 해서 운전면허증, 여권 등을 지참해야 하는데 영국인 중 상당 비율이 아직 여권도 없고, 운전을 안 해 면허증도 없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현 보수당 전통 지지자 중에서도 이번 총선에서 지지를 안 하겠다는 유권자들도 많다.
 
어쨌든 경관과 팔터 사이의 대화록에서 문제의 부분만 딱 잘라서 보면 경관의 말이 조금 거칠었고 강압적이었다는 인상은 든다. 하지만 한 전직 총경은 “팔터가 경관을 밀어내면서 길을 건너려고 한 일은 분명 범법 행위였다”며 “말로 논쟁은 할 수 있어도 일단 몸으로 조금이라도 공무 수행 중인 경관을 밀면 공격으로 보며 범법 행위다. 내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으면 경관 공격과 현장질서 파괴 혐의로 체포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건 사실 맞는 말이다. 영국에서는 경관에게 어떤 형태로든 손을 대거나 심지어 욕을 해도 현장에서 체포해 수갑을 채워 연행해간다.
 
진보성향의 더가디언도 팔터의 행동이 “눈에 띄게 의심스럽긴(distinctly fishy) 했다”고 지적했다. 팔터는 토요일이 예배 드리는 날이라 예배당에서 나와서 산책을 하는 일이 일상이라면서 ‘바로 그 길’을 매주 건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경관이 당신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조금 조용한 길로 안내(escort)하겠다며 따라오라고 정중하게 권했는데도 거절하고 경관과 몸싸움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언쟁을 팔터가 동행한 동영상 기사가 촬영했다. 결국 팔터는 이런 논쟁과 언쟁을 예상하고 고의로 도발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경관들도 ‘이 길이 일상이다’라는 그의 말이 솔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사실상 영국 사회에서 가장 써서는 안 되는 ‘거짓말을 했다’는 의미다. 결국 당신은 이 길을 일부러 건너 친팔레스타인 시위대를 도발해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돌려 말한 셈이다. 어찌 보면 ‘대서특필을 노린 의도적인 도전(deliberately provoked a headline-grabbing confrontation)’에 영국 보수 언론이 놀아난 꼴이다.
 
경찰의 행동은 팔터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도 아니었고, 팔터의 안전을 위한 공정한 공무집행이었다. 흡사 축구 경기에서 일상적으로 경찰이 양측 팬들을 분리하려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이는 친팔레스타인 시위대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경관이 13분 동안 초인적 인내심을 가지고 정중하게 팔터를 대했는데도 ‘악당(villains)이 되어 버렸다’고 더위크지는 지적했다.
 
동영상 전체가 공개된 후 팔터의 행위가 폭력사태 도발을 위한 의도적 도전이었다는 비난 여론도 비등해졌다. 특히 인터넷 댓글들은 팔터를 거의 악마화하고 있다. 사태를 유발하려고 동영상 촬영기사를 대동한 일부터 경관을 몸으로 밀어붙이면서 감정을 자극한 행위까지 ‘유대인 행동그룹의 전문가답다’는 악평이 나온다. 
 
그가 유대인이 런던 시내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데는 분명 성공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런던 경관이 안전하지 못하니 피해가라고 권했고, 권유를 듣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했으니 런던에서 유대인의 안전을 경찰이 100%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런던 경찰이 증명한 셈이라는 것이다. 또 ‘분명하게 유대인으로 보이는 것’이 도발 이유가 된다는 점이 증명되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 자체가 팔터를 악마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 어디에서든 키파 모자를 쓰고 다니거나 심지어 정통파 유대교도들처럼 검은 모자를 쓰고 머리를 길게 땋아내리고 검은 코트를 입고 다녀도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그러려니 하는 현실에서 ‘분명하게 유대인으로 보이는 것’을 도발 이유로 만든 일은 과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친팔레스타인 시위에 나서는 유대인들
 
사건이 좀 잠잠해지자 만일 현장 경찰이 팔터가 시위대 중간을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한 칼럼니스트의 글도 나왔다. 칼럼은 현장 경관의 노파심일 수도 있다면서 당시 시위대는 상당히 평화적이었고 더군다나 시위군중들 중에는 상당한 비율의 유대인들도 섞여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실 요즘 친팔레스타인 시위 군중의 대다수는 영국인들이다. 지난해 10월 가자지구 전쟁 초반 이스라엘 시민들이 인질로 잡혀 있을 때만 해도 하마스 비난 집회를 열었지만 이스라엘군이 대규모 반격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런던 중심가 시위가 친팔레스타인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시위대 중에는 유대인 비율도 상당하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친구’라는 팻말부터 ‘당장 전쟁 중단’이라는 구호 밑에 ‘런던 유대인’과 하트를 정성스럽게 그린 종이를 들고 있는 유대인 할머니도 보인다. 심지어 홀로코스트 생존자 11명과 희생자 후손들도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온 유대인 이민자이자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다 잃은 87세 노인은 ‘홀로코스트를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빌미로 쓰지 말라’는 팻말을 들고 있기도 했다. ‘우리가 여기 이렇게 참여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음모가 잘못되었다는 걸 증명한다’라고 쓴 팻말도 있었다. 팔터의 동영상을 보고 친팔레스타인 시위에 참석했다는 북부 런던에서 온 한 유대인 가정의는 2차대전 전에 동구권에서 나치의 침공을 피해 피란온 자신의 아버지 사진을 목에 걸고 나왔다. 
 
그는 현재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량학살이 나치 독일이 행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항의한다. 이스라엘의 만행이 틀린 일이라는 걸 주장하듯 ‘분명하게 유대인(Openly Jewish)’이라는 슬로건을 친팔레스타인의 의미로 쓰고 있다. 그는 “내 아버지가 피해 온 대량학살이 지금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 희생자인 우리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들의 후손인 우리가 그건 잘못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그러려고 시위에 참여했다”라고도 했다.
 
현장에서 ‘계속 시위대를 가로질러 통행하겠다’고 했던 팔터도 시위 현장에 다시는 안 나타났다. 자신이 나타나면 이제는 경찰이 막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고 그렇게 되면 차라리 손해라는 판단인 듯하다는 언론의 분석이다. 사실 팔터의 CAA는 유대인 사이에서도 극단적 행동을 일삼는 극우단체라는 평을 받는 소수단체라 이번 사태로 자신들의 존재를 크게 드러내는 성과는 있었다. 그들이 최초 목적을 이룬 건 사실이지만 런던 경찰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만들려는 목적은 실패한 셈이다.
 
어쨌든 런던에서는 지난 4월 27일 주말에도 20만여명의 시위대가 행진했다. 또 런던 경시청장은 반유대적인 경관의 언행에 대해 “경관의 ‘사려 깊지 못한 단어 선택(poor choice of words)’은 정말 유감스럽다”라고 사과하면서 무사히 자리를 지켰다. 사실 런던 시정을 책임지는 사람들로서는 시위와 언쟁 등 모든 것들이 골치 아플지 모른다. 가자 전투 이후 하원의원을 비롯한 정치인 경호와 경비비로만 지난 2월 말까지 3100만파운드가 들었다. 여기다가 시위대를 막는 경찰 경비 비용 3900만파운드를 합해 도합 7000만파운드(약 1225억원)가 넘는 예산이 지난 2월 말까지 쓰였으니 시위로 인한 모든 소란이 지긋지긋할 법하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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