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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세상에는 수도 없는 민족이 있고, 수도 없는 문화와 관습이 있다. 그러나 영국인들을 비롯해 유럽인들이 유명인들의 데드마스크를 제작해 보관, 전시하는 풍습은 아직도 참 받아들이기 어렵다. 유명인사의 기념관에서 데드마스크와 맞닥뜨리면 언제나 섬뜩하다.
 
그런데 영국에는 그보다 더 그로테스크한 얘기가 있다. 죽은 사람의 실제 머리를 사람들이 보관하고 전시했다는 것이다. 바로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한 올리버 크롬웰의 잘린 머리 이야기인데, 실제 크롬웰의 머리는 300년간 사람들 손을 전전해왔다. 올리버 크롬웰은 21세기인 지금도 입헌군주 체제를 유지하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영국에서 당시 국왕인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실질적인 공화국 실험을 11년(1649~1660)간 해본 인물이다. 그래서 크롬웰을 ‘민주주의의 상징적 존재’라고 추앙하는 사람들도 많다.
 
 
 
 
 
웨스트민스터 지붕에 30년간 걸려있었다
 
크롬웰의 머리 이야기는 그의 사후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복위되어 돌아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과정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이다. 11년간의 프랑스 망명에서 돌아와 복위한 찰스 2세는 아버지의 원수 크롬웰을 부관참시했다. 그때 잘린 크롬웰의 머리를 웨스트민스터 의사당 부속건물인 웨스트민스터홀 지붕에 막대기에 꽂아 30년을 달아놓았다. 그렇게 달렸던 머리가 어느 날 바람에 떨어졌고 그 머리를 의사당 경비 군인이 주워서 집에 가져가 보관했다. 사실 그는 그 머리가 누구 머리인 줄도 모르고 그냥 호기심에 주워왔다. 그러나 크롬웰 머리가 실종되자 ‘크롬웰 머리를 갖고 오는 사람에게 후한 상금을 내린다’는 공고문이 내걸렸다. 경비 군인은 큰 잘못을 저지른 줄 알고 겁에 질려 집 굴뚝 안에 머리를 숨겨 놓았다. 이후 죽기 직전에야 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의 딸은 이후 개인 수집가에게 크롬웰 머리를 팔았고, 그렇게 해서 크롬웰 머리는 여러 개인 수집가들의 손과 박물관을 거치다가 결국 크롬웰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교 시드니서섹스칼리지 교내 성당 안에 현재 묻혀 있다.
 
사망한 지 겨우 2년 만에 파헤쳐져 부관참시된 크롬웰의 머리가 1960년 다시 묻힐 때까지는 300년이 걸렸다. 그의 머리가 세상을 돌아다닌 이야기는 거의 오디세이만큼이나 흥미롭고 동시에 기이하다. 크롬웰이 아무리 유명하고 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한 인간의 머리가 흥미거리가 되고 흥행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엽기적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어디까지 충족되어야 만족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크롬웰은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어 의회 없이 11년을 통치한 찰스 1세와 9년간 시민전쟁을 벌였다. 결국 전쟁에서 이긴 크롬웰은 찰스 1세를 1649년 참수했다. 왕이 없는 공위시대(British Interregnum)를 연 크롬웰은 각종 병으로 고통을 겪다가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신이 원하던 청교도혁명을 이룬 지 겨우 9년 뒤였다. 그의 장례식은 1658년 11월 23일 치러졌는데 시신은 부패가 너무 빨리 진행돼 장례식 2주 전에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혔다. 장례식 때는 실제 시신 없이 관 위 크롬웰 등신대 모형(effigy)만 조문객들을 맞았다. 그의 장례식은 어느 국왕 국장보다 더 성대하고 거창하게 치러졌다. 크롬웰의 관은 왕의 문장으로 장식되었고, 왕의 관과 같은 납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뒤 왕실 직할 성당인 웨스트민스터사원 내 제일 동쪽 끝 지성소(至聖所) 바닥에 묻혔다. 지성소는 동쪽 끝이라 아침에 제일 먼저 햇빛이 들고, 예수 탄생 성지인 베들레헴 쪽이라는 이유로 가장 성스럽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제들이 미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크롬웰이 묻혀 있던 장소에는 현재도 바닥에 표지판이 있는데 ‘1558년에서 1661년 사이에 올리버 크롬웰이 묻혔던 곳이다’라는 간략하고 냉정한 설명만 적혀 있다. ‘호국경이 어떻고…’ 하는 상세한 설명이 적힌 시드니서섹스칼리지 표지판 과는 다르다.
 
 
 
 
 
 
크롬웰 부관참시한 찰스 2세의 복수극
 
찰스 2세는 복위하고 정권을 안정시키자마자 지성소에 잠든 크롬웰의 시신을 끄집어낸 후 당시 공개처형 장소로 유명했던 타이번 형장에서 부관참시해버렸다. 이때 국무원 의장이자 찰스 1세 처형판결을 내린 재판의 주심 법관과 시민전쟁 총사령관이자 크롬웰의 사위도 같이 부관참시해버렸다. 부관참시는 시신을 매달아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교수형에 처한 후 시신의 목을 도끼로 8번 내려쳐서 참수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참수한 머리는 웨스트민스터홀 지붕에 6.1m 높이의 장대에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는 거기에 30년간 방치했다. 부관참시일은 찰스 1세의 처형일인 1월 30일이었고, 머리를 매단 웨스트민스터홀은 찰스 1세의 재판 장소였으니 복수를 제대로 한 셈이었다. 이렇게 보면 영국인들의 뒤끝도 대단하다.
 
찰스 2세는 찰스 1세의 사형 재판 판결 서류에 서명과 양초로 직인을 찍어 동의한 59명 중 당시 생존해 있던 12명을 체포해 왕 살해(regicides) 국사범으로 처형하기도 했다. 영국의 중죄인 사형방법인 ‘교수형, 내장 축출, 시신 
 
4등분(Hanged, Drawn, Quotered)’을 차례로 적용해 처형했다. 반면 시민전쟁에서 자신의 아버지 찰스 1세에 맞서 싸웠던 크롬웰군의 일반 장졸들은 모두 사면했다.
 
당시 중죄인을 사형하는 방법은 정말 끔찍했다. 말에 죄인을 달아 뉘인 채 런던 길거리를 끌고 다닌 뒤 사형장으로 와서 교수형, 내장 축출, 시신 4등분 처형을 가했다. 일단 줄에 목을 매달아 교수형을 한 뒤 숨을 거두기 전에 산 채로 배를 가른 후 내장을 꺼내고 그걸 사형수의 눈앞에서 태운 뒤 참수를 하는 끔찍한 방식이다. 그리고는 시신을 4개로 절단한 후 처리한다. 결국 사형수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내장이 파내어지는 걸 고통 속에서 본 후 산 채로 머리가 잘린다는 뜻이다.
 
당시 런던 시민들은 사형수의 엄청난 고통을 구경거리로 지켜봤다. 기록에 의하면 이런 처형이 있는 날은  런던 시민의 반이 나와서 구경을 했다고 한다. 처형장 인근에는 각종 물건을 파는 상인들로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처형이 일종의 흥행 이벤트이고 모두가 즐기는 오락거리였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의 처형은 1870년까지 존재했었다.
 
크롬웰 부관참시는 현재 하이드파크 북쪽 옛 버킹엄궁 대문 중 하나였던 마블아치 인근의 타이번에서 치러졌다. 그렇게 잘린 크롬웰의 머리가 수집가들과 박물관을 전전하는 동안 가짜라는 의심도 계속 받았다. 동시에 크롬웰을 존경하는 지지자들에게는 거의 성물로 취급받아 순례객들이 머리를 소장한 박물관으로 몰려오곤 했다. 영국인들에게 크롬웰은 워낙 관심이 많은 인물이어서 그의 머리는 계속해서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75년과 1935년 과학자들에 의해 크롬웰 시신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특히 1935년에는 당시 최고의 우생학자, 인류학자 두 명이 조사 분석한 후 109쪽짜리의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크롬웰의 머리에 대한 자신들의 결론은 ‘도의적인 확실성(moral certainty)’을 갖는다고 돼 있다. ‘합리적인 의심도 불가능할 정도로 개연성이 높다(probability so great as to allow no reasonable doubt)’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계기로 해당 머리가 크롬웰의 머리라는 점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크롬웰 머리는 1790년 런던의 한 개인 박물관이 당시 돈 500파운드(현재 약 4만파운드·약 7200만원)에 구매해서 전시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1799년 한 개인 수집가가 크롬웰 머리 전시회를 열었다는 포스터도 존재하는데, 이 전시회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머리가 가짜라는 소문이 돈 데다 입장료도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머리는 여러 손을 거치면서 가격이 1799년에는 230파운드(현재 1만9000파운드·약 3400만원)까지 떨어져 버렸다.
 
크롬웰의 머리에 관한 자료들은 현재도 인터넷에 수도 없이 올라와 있다. 타이타닉에 대한 영국인들의 이상한 호기심과 흡사하다. 심지어는 웨스트민스터홀 지붕에 머리가 매달려 있을 때의 위치에 대한 논의도 진지하게 오고 간다. 웨스트민스터홀 지붕에 30년간 머리가 달려 있던 장소가 남쪽 지붕이었는지, 북쪽 지붕이었는지를 둘러싼 논쟁도 있다.
 
 
 
수집가와 박물관을 거쳐간 크롬웰 머리
 
머리 부분을 제외한 크롬웰의 시신에 대한 논란도 수도 없이 많다. 그가 죽자마자 근왕파들의 보복을 걱정한 측근들에 의해 잘 밀봉된 관에 담겨 템스강에 수장되었다느니, 크롬웰의 가장 위대한 승리의 현장에 밤 12시에 매장되었다느니 등 온갖 소문이 많다. 심지어 영국 최고의 일기작가 사무엘 핍스는 ‘크롬웰은 생전에 영국 왕들의 왕릉을 파헤쳐 유골들을 바꾸어 놓아버렸다’라는 기록도 남겨 놓았다. 이를 믿는 후세 사람들은 찰스 2세의 복수가 자신의 선조 왕들 시신에 가한 일이라는 주장도 편다. 더욱 기가 막힌 소문은 찰스 2세가 복수한 시신이 자신의 아버지 찰스 1세의 것이라는 내용이다. 크롬웰이 죽자마자 찰스 1세의 무덤에서 시신을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다. 복수를 위해 찰스 2세가 웨스트민스터의 크롬웰 무덤을 팠을 때 담당자가 크롬웰의 추종자여서 인근에 묻힌 크롬웰의 부하 시신과 바꿔치기 하고 진짜 크롬웰 시신은 어딘가에 따로 매장했다는 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어찌됐든 세상을 전전하던 크롬웰의 머리는 1957년 당시 소유주가 죽은 후 그 아들이 ‘더 이상 구경거리가 되는 수모를 겪게 하지 말자’는 뜻으로 크롬웰의 모교인 시드니서섹스칼리지와 접촉해 칼리지성당 내의 기도실 어딘가에 묻혔다. 기도실에 가면 ‘이 장소 근처에 1960년 3월 25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호국경이며 본 칼리지의 1616년 졸업생인 올리버 크롬웰이 묻혔다’라는 타원형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죽은 지 40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지금도 크롬웰의 머리가 정확히 어디에 묻혀 있는지 밝히지 못할 정도로 아직 적이 많다는 뜻이다. 하긴 영국 왕실은 아직도 찰스 1세에게 반역자라는 누명을 씌워서 처형한 크롬웰에 대한 악감정을 숨기기 않는다. 현 영국왕의 공식 명칭을 굳이 찰스 3세로 정한 걸 봐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영국 언론도 크롬웰을 지칭할 때 항상 ‘논란의 여지가 많은(controversial)’이란 표현을 붙인다. 그만큼 존경하는 사람도, 악당(villain)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많다는 뜻이다.
 
크롬웰은 영국을 왕의 국가가 아닌 신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그가 공화국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종교가 국가를 통치하는 신정국가를 만들었다. 크롬웰은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일만 해야지 놀아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에 따라 영국 내의 모든 사교활동은 금지되었다. 즐거움을 위한 모든 오락도 금지되었다. 크롬웰에 의하면 모든 영국인들은 자고, 먹고, 일하고,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했다. 
 
크롬웰은 자신의 군대마저도 엄격하게 다루었다. 일단 입대하면 제대로 훈련을 시켰고, 바른 언행을 하게 했다. 욕을 하면 벌금을 내게 했고, 술이 취해서 문제를 일으키면 영창에 가두었다. 그렇게 엄한 규율을 잘 따르면 충분한 보상도 했다. 특히 놀라운 점은 당시 사회 신분에 따른 계급을 정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대우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크롬웰의 신기군(新技軍·New Model Army)은 일당백의 능력을 가졌다. 거기다가 모든 군인들이 청교도들이어서 종교로 세상을 구한다는 신념으로 뭉쳤다. 순수 민간인으로 이루어진 시민군이 근왕군대를 이기고 영국 시민혁명을 성공시킨 배경이다.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 실험 시기를 영국인들은 ‘크롬웰의 영국 사회 봉쇄(Oliver Cromwell’ Lockdown)’라고 부른다. 그 시기 모든 펍과 극장은 문을 닫았고, 운동 경기마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크롬웰은 인간의 모든 즐거움이 신을 경배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 철저하게 유흥과 오락을 금지했다. 공을 가지고 놀면 처벌을 받았는데 일요일은 특히 처벌이 더 심했다. 욕을 한다거나 싸우면 감옥에 가뒀다. 일요일은 모든 영국인이 일을 멈추고 성당에 무조건 가야 했다. 만일 일요일 성당에 안 가다가 발각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감옥에 가야 했다. 심지어 중병 환자도 들 것에 실려서라도 성당에 가야 했다. 당시 영국은 11개 지역으로 나뉘어 집정장군(Major General)에 의해 통치되었다. 여자는 얼굴만 빼고 모든 부분을 가려야 했고, 화장은 금지되었다. 채색된 옷도 못 입었다. 성탄절도 없어졌고, 성당 내의 성상과 성화도 우상숭배라고 파괴되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영국인들은 ‘거의 테러를 당하는 듯했다’고 기록했다.
 
그런 독재의 경험으로 인해 영국인들은 지금도 절대권력을 선출하는 정치 형태를 택하지 않는다. 영국 정치제도는 절대 권력을 한 명에게 주는 국가수반 직선제를 채택하지 않고 언제든지 국민여론에 따라 지도자를 임기 중에도 갈아치울 수 있는 의원내각제로 운영된다.
 
크롬웰의 공화정 실험은 인간의 욕망을 너무 죄악시한 탓에 국민들의 반발로 결국 실패로 끝났다. 크롬웰이 인간의 욕망을 철저하고 혹독하게 억압해서 영국 국민들이 고통받던 시기 찰스 2세는 프랑스에서 여자들과 마시고 먹고 즐기는 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크롬웰의 11년간 봉쇄에 지친 영국인들은 두 손을 벌려 찰스 2세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했다. 영국인들은 찰스 2세가 그의 아버지만큼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찰스 2세는 자신의 힘으로 복위되지 않은 탓에 측근들의 강권에 가까운 권유에 따라 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영국 국민들은 독재자보다는 차라리 이런 리더십을 좋다고 여겼고 덕분에 찰스 2세는 신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래서 영국 역사는 찰스 2세를 ‘즐거운 왕(Merry Monarch)’이라고 부른다. 그의 통치 시절이 영국 역사에서 가장 평화롭고 평온한 시절이었다고도 기록돼 있다.
 
 
 
신정국가 설립한 크롬웰 재평가
 
망명에서 돌아온 찰스 2세는 크롬웰이 금지한 모든 것을 허용했다. 펍과 극장은 다시 열렸고, 운동 경기도 다시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찰스 2세는 당시 유럽 최고 선진국이던 프랑스에서 11년간 보고 들은 바를 영국에 행하고자 했고 대부분 성공시켰다. 청교도 정신에 의해 억압받던 여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화장하고 치장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인간의 기본 욕구를 허용했으니 찰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각종 공연에서 여성 역을 여성이 맡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찰스의 즐거움이 공연 감상과 여인이었으니 이 둘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일거양득의 조치를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크롬웰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최근 들어 크롬웰에 대한 인기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크롬웰에 관한 뉴스는 아무리 작은 뉴스라도 언론을 탄다. 지난 4월 24일 BBC는 크롬웰의 고향 케임브리지주의 헌팅턴 마을의 올리버크롬웰박물관이 전년도에 비해 입장객이 23% 늘어 지난 25년간 가장 높았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또 지난 10월 6일 BBC는 크롬웰박물관이 크롬웰의 회중시계를 구매하고자 한다는 기사도 내보냈다. 350년이 넘은 은장의 회중 시계는 금액이 9500파운드(약 650만원)나 됐지만 결국 박물관은 구매에 성공해서 현재 전시 중이다. 지난 10월 24일에는 크롬웰박물관이 개관 60주년 되었다는 기사도 나왔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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