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나는 런던-71
보트가 있는 해안/ 코트먼
Seashore with Boats/ John Sell Cotman
영롱한 사랑의 노래
영국의 자연은 먹다가 남겨둔 과자와 같다. 슈퍼마켓의 선반에서 막 골라 내렸을 때의 신비로움이나 봉지를 막 뜯어 먹기 시작할 때의 설렘과 흥분의 감흥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만, 먹다가 쑤셔 박아둔 그 과자봉지는 언제나 끝나지 않은 우리의 여정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의 웅장함이나 화려함을 보여주는 대신 영국의 자연은 우리가 떠나는 자라는 진리를 끝없이 가르쳐준다. 화려함 대신 소박함으로 기괴함대신 상이함으로 영국의 자연은 무언가 말하고 있다.
나는 아들과 딸에게 영국의 자연을 ‘주관식 자연’이라고 부르곤 한다. 모두가 공감하고 감탄할만한 객관적 화려함이나 기괴함은 없지만, 개개인의 감성을 지독하게 자극할만한 깊은 생명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밀리 브론테가 만난 폭풍의 언덕(Yorkshire)이나 윌리엄워즈워스가 만난 호수(Lake District)는 자연이 인간의 주관적 감성 속에서 푹 빠져든, 영국에선 흔하디 흔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눈에 띄게 낭만주의가 발달했던 것은 영국의 자연이 보여주는 완강한 생명력,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보려는 자에게는 무한히 보이는 그 신비의 매력 때문이라고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자연을 지켜 내려고 오래 전부터 고심하였던 영국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우리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영국인들의 자연에 대한 애정은 현대미술의 한 유형인 ‘대지예술(Land Art)’이라는 장르가 잘 보여주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낭만적이고 무한한 문제 제기를 하는 ‘대지예술’은 영국계 미술가들이 만들어낸 통찰력 넘치는 예술적 발상이었다.
자연을 어떻게 주관적으로 볼 것인가?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 품을 것인가? 어떻게 내 마음 속에서 다시 한번 살아나는 자연의 오묘함을 맛볼 것인가? 이 화두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예술을 만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 예술가들의 자연에 대한 서정을 바라보는 것은 낭만을 넘어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관찰하는 묵직한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수채화로 유명한 영국 화가 존 셀 코트먼(1782~1842)의 희소성 있는 유화 한 점 ‘보트가 있는 해안(1808, 테이트브리튼)’이 나에게는 그런 즐거움을 주는 대표적인 그림이다. 아쉽게도 현재는 이 그림을 볼 수 없다. 테이트재단은 2005년 이후 이 그림을 전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대로 도판만으로 보아도 그 즐거움이 별로 줄어들지 않는 그림이다. 소품(283X 410mm)이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동부 노포크지방의 중심도시 노리치 출신인 코트먼은 19세기 영국 풍경화가들의 모임이었던 노리치화파(Nowich School)를 대표했던 화가다. 바다를 주로 그렸던 그의 풍경들은 터너처럼 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소박하게 영국 자연들의 무게감을 그대로 화폭에 담은 것이 특징이다. 터너의 위대함이 자연의 놀라운 변화 앞에 선 인간의 움직이는 감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면, 코트먼의 위대함은 자연의 변함없는 전신 앞에 선 인간의 착 달라붙은 감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때때로 그의 풍경들이 추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자연에 착 달라붙기 위한 코트먼만의 주관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이미 최고의 독학파 수채화가로 이름을 얻었던 스물 여섯에 그려진 이 작은 유화는 칙칙하고 어두운 영국의 풍경을 수채기법을 사용하여 낭만적으로 표현하였던 그의 초기작품들 보다 한결 밝아지고 한결 영롱해진 그림이다. 육지에 올라와 있는 배들을 그리고 있다. 바다를 힘차게 항해하던 몸매를 육지 위에 눕히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배들을 중심으로 잉글랜드 어느 바닷가(Cromer Beach)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바다는 아주 약간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배들이 주인공인 셈이다. 배들은 인간을 대신하는 문명의 이기이다. 인간 대신 헤엄쳐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항해하는 인간의 대역이다. 그것들이 마치 짐승들처럼 육지에 널브러진 모습이다. 거리감에 비해 명확히 그 형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배들을 향한 길들은 영국 자연의 주관성을 암시하는 것 같다. 영국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 모습이 전혀 추상적이 아니라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변화무쌍한 낮은 하늘, 서늘함으로 다가서는 어두움, 뿌옇게 부서지는 표현하기 힘든 영롱함의 정체……
수채 물감처럼 번지고 있는 하늘의 구름들은 이 그림의 매력을 한층 고조시켜주고 있다. 쉬고 있는 배들이 당장이라도 올라가 구름 속을 유영할 것만 같다. 일탈과 비상을 꿈꾸는 인간들처럼 배들도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도가 만들어낸 작은 웅덩이는 그 허황된 욕망이 한갓 망상이라고 일갈하고 있는 듯 하다. 거친 모래들은 투깔스럽지만 정교로운 영국 자연의 자본처럼 퉁명스럽게 누워 있다. 아마도 바람은 이미 서늘하게 불고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다음해 코트먼은 이 바닷가 근처에 살던 앤(Anne)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매력적 문양의 구름과 거친 모래들, 덤덤한 바다 앞에서 그들의 사랑을 지켜 보고 있었을 배들을 청중 삼아 코트먼은 한 곡의 사랑 노래를 부른 것이다. 뿌옇게 부서지는 영롱한 사랑의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