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나는 런던-67
교황 율리우스 2세/ 라피엘로
Pope Julius Ⅱ/ Rapael
특수거울의 비밀
모든 인간이 모방하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듯이 화가들도 모방을 통해 자신의 미에 대한 거푸집을 완성시키려고 한다. 모방은 모방을 낳고 그 모방은 역시 모방을 낳는다. 미술사라는 것은 모방의 역사를 정리한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모방이 없다면 이 세상의 조화는 쉽게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예술 안의 모방이 보편 타당한 권리를 취득하게 된 것은 예술의 출발이 어차피 자연 혹은 대상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시작되는 언어도 모방이요, 자신이 창조한 것으로 믿는 우리의 취향도 사실은 어느 배우의 모방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아우라의 탄생설화에는 모방이 숨어있을 것이다. 비틀스는 척베리의 모방에서 시작되었으며, 롤링스톤스는 머디워터스의 모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이 만들어내는 고고한 아우라를 우리는 더 이상 모방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모든 예술은 모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예술의 동기라고 할 수 있는데, 모방을 통해 가장 완벽한 신화를 탄생시킨 화가로 라파엘로(1483~1520)를 호명하고 싶다. 라파엘로는 모방할 만한 위대한 두 화가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동시대를 살았던 행운아였다. 피카소와 더불어 화가로서의 시대적 행운을 누린 대표적 인물이다. 화가의 명성이 미켈란젤로로 연상되듯이, 화가의 천재성이 피카소로 연상되듯이, 화가의 완성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인물이 라파엘로다.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미술의, 시쳇말로 종결자였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때때로 자신이 꿈꾸는 이데아를 그려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림의 미를 위해서라면 현실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라파엘로의 미술관은 후대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이나 명암법을 모방하여 결국 다빈치를 능가하는 예술적 유형을 만들어 내었으며, 미켈란젤로를 질투 나게 할 만큼 너무도 산뜻하게 생기 넘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내었다. 그는 고전주의에 입각한 관점에서라면 가장 완벽한 그림 속의 미를 창조해낸 모방의 천재였다.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런던을 대표하는 작품은 내셔널갤러리의 ‘교황 율리우스 2세(1511~1512)’다. 가장 강력한 군주였으며 미켈란젤로나 라파엘을 통해 예술을 구현하였던 미술사의 위대한 후원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다. 이 초상화는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아마도 가장 많은 화가들이 모방하였던 초상화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그림의 구도나 섬세함이 별다른 새로운 감흥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오리지널리티에 훼손을 줄 만큼 너무도 많은 후배들이 모방한 초상화의 자세와 기법들이 숨어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의 탁월한 오리지널리티는 모델인 교황의 자세에서 비롯된다. 화려한 의전용 왕관 대신 평상시의 모자를 쓴 교황은 자신 가문의 상징인 도토리 장식이 된 의자에 앉아 있다. 그리고 우리로부터 아주 약간 각도를 틀고 앉아 있다. 앞 모습과 옆모습의 중간쯤이다. 이 오묘한 각도로부터 이 그림의 느낌은 시작된다. 교황은 아주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다. 흔치 않은 얼굴 각도가 나오고 있다.
그의 얼굴은 징그러울 정도로 진짜 같다. 이마의 명암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강하며, 눈 주변의 굴곡은 어두우면서도 자연스럽다. 다문 입은 금방이라도 열리며 뭐라고 중얼거릴 것처럼 생생하다. 그가 재위기간 중 유일하게 이 시기에 길렀다는 수염은 낯설고도 특이하다. 손수건을 잡고 있는 오른 손은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건강해 보이는데, 검지와 중지의 자세가 극히 아름답게 보인다. 의자를 부여잡고 있는 왼손도 결코 우리가 흔히 보아 왔던 자세가 아니어서 그림의 무게감을 유지시켜 준다.
볼로냐 지방을 잃은 후의 모습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지만, 전쟁에 참전할 정도로 활동적이었으며 교회 재산을 적극적으로 늘렸고 권위적이고 위엄 넘쳤다는 율리우스 2세의 이미지와는 왠지 걸맞지 않아 보인다. 마치 어느 평범하고 달관한 노종교인의 진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라파엘로가 어떤 식으로 교황을 납득시키며 이 그림을 완성시켰을 지를 상상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라파엘로는 분명 교황을 설득시켰을 것이다. 위엄과 권위를 그토록 강조했던 율리우스 2세에게 초라한 수준을 간신히 뛰어넘은, 소박하고 평범한 자세의 모습을 선사하며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했을까? 아니면 인생무상을 절감한 노인이었던 교황이 라파엘로의 아이디어에 선뜻 동조했던 것일까?
어떤 곡절이었건 라파엘로는 강력한 권력을 누린 인간의 초상을 평범한 모습으로 완성시킴으로써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리고 그림이 특수한 거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화가라는 렌즈가 장착된 그림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보이는 또 하나의 모습, 화가가 만든 이데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그림 속의 완벽한 미가 바로 라파엘로의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