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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특종

 

 

 
 
 
영국 템스 강변에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있다. 2014년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영국을 방문하는 한국 고위급 인사들의 필수 방문 코스다. 대통령, 총리, 자치단체장, 국회의원 등 런던에 온 고위급 인사들은 한국전 당시 20세 전후의 젊음을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나라에다 바친 그 희생에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들이 참전 기념비에 헌화하고 묵례하는 모습, 당시 참전한 영국군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을 보며 감회에 잠긴 모습이 한국 언론에도 자주 나온다. 죽은 동료를 애도해 모자를 벗고 서 있는 영국군을 표현한 조상은 그들이 처음 체험한 한국의 혹독한 겨울을 두꺼운 외투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애잔한 시선의 조각상과 나란히 선 한국 고위급 인사의 모습을 한국 언론은 영국발 소식으로 자주 전한다. 아쉽게도 정작 그 조각상의 주인공을 직접 만난 모습은 드물고 매번 기념비만 등장한다.
 
올해 재향군인회 영국지회에서 마련한 한국전 68주년 기념식에는 참전용사 한 분이 자신의 참전기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옛전우들과 다정한 이웃들과 그를 초대한 영국의 한인들과 자신의 손자 손녀 앞에서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려 수차례 연습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노병은 결국 이날 행사에 오지 못했고 그의 참전기를 들을 수 없었다. 영국의 한국전 참전용사 모임에는 해가 갈수록 이런 일이 더 흔한 일이 되었다. 잊혀진 전쟁, 잊혀진 인물들이 될까 우려하던 것이 이제는 뚜렷한 현실이 되고 있다.
 
다행히 영국에는 이들 참전용사를 잊지 않고 이웃으로 지내며 늘 교류를 가지는 한인들이 있다. 숨어있는 민간 외교관이라 할 이들로 인해 한국과 영국이 혈맹이라는 뜨거운 기억을 참전용사들은 다시 상기하는지도 모른다. 참전용사들과 모임을 정례화한 한인들과 한인 단체 중 첫 주자로 꼽을 곳이 레딩한인회이며 그 중심에 조신구 레딩한인회장이 있다. 런던에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레딩은 런던보다 아주 적은 수의 한인이 사는 작은 도시다. 그러나 런던 코리아타운에서도 하지 못할 큰일을 레딩한인회 사람들은 똘똘 뭉쳐 매년 끊이지 않고 치러낸다. 참전용사와 레딩한인회는 2001년부터 매년 6월 25일을 전후해 기념행사를 하고 한인들이 마련한 음식을 나누고 한인들이 마련한 공연을 보며 함께 흥겨운 잔치를 연다. 
 
레딩한인회와 참전용사의 모임은 2001년 우연한 인연으로 시작됐다. 그해 레딩 한인교회가 설립됐다.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한인들이 모이는 공동체가 만들어지자 지역을 위해 좋은 일을 해보고자 교회에서 바자회를 개최했다. 당시 수익금 800파운드를 '북한 어린이 돕기' 기금으로 쓰자는데 한인들의 의견이 모이자 이 돈을 레딩 지역 카운슬에 전달했고 이 소식을 들은 레딩 지역 신문에서 미담을 보도했다. 마침 레딩에 영국 한국전 참전용사회(British Korean Veterans Association : BKVA) 레딩지부가 있었는데 소속 참전용사들이 이 신문기사를 보고 먼저 레딩교회에 연락한 것이다. 참전용사들은 "아. 레딩에도 한국인이 있었구나" 했고 한인들은 "아, 레딩에 참전용사회가 있었구나"하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갖고 서로 처음 만났다.
 
처음 레딩교회에서 시작된 만남은 이후 레딩한인회를 만들어 한인 전체의 사업으로 확장됐다. 교회 행사의 차원을 넘어 한인들의 행사로, 레딩에 사는 한인들은 모두 참여하는 뜻 있는 만남으로 발전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참전용사와 레딩에 사는 한인들은 만남을 정례화했는데 6월 25일 전후로 기념식을 하고 한국 음식을 함께 먹고 소규모 공연을 하는 함께 즐기는 잔치를 갖기로 했다. 2001년부터 참전용사와 그 부인이 약 40명 정도 참가했다. 참전용사가 죽으면 그 부인이 나오고 이제는 그 자녀가 대신 참석하는 가정이 많아졌다. 이 행사는 참전용사들과 한인들이 만나는 자리지만 참전용사들이 일 년에 한 번 지역에 사는 옛전우를 모두 만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2015년 전국 단위로 있던 BKWA가 해체되자 지역 단위로 BKWVA라는 참전용사 단체가 새롭게 만들어졌는데 레딩한인회의 조신구 회장은 참전용사들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으로 최초로 임원으로 임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임원이 되면 어떤 혜택이 있냐고 물었더니 연회비 5파운드(7500원)를 내지 않는 특혜가 있다고 했다. 참전용사들을 위해 더 특별한 봉사를 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지는데 그는 해마다 행사를 힘겹게 치르지만, 한편으로 즐겁게 치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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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참전용사들과 한인들 만남의 날에는 예년과 달리 특별한 행사가 하나 더 있었다. 참전용사들과 한인 목사들의 채플린 결성식이 있었다. 영국 전역 각 도시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사 17명이 올해 행사에 직접 참석하거나 오지 못한 이들도 취지에 동의하고 향후 함께 활동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영국 각지에 있는 한인 목사들은 참전용사들의 요청이 있으면 아플 때 방문해 기도해주고 장례식에서 예배도 집전해주는 채플린 결성식을 한 것이다. 참전용사들은 대부분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날 결성된 공식 목사단은 참전용사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디라도 찾아가 함께하고 도움을 주기로 했다. 레딩을 비롯해 인근에 BKWVA가 있는 도시 옥스퍼드, 스윈든, 왓퍼드 등은 물론 버밍엄, 맨체스터 멀리 스코틀랜드까지 참전용사들의 마지막 여정을 편안히 지켜줄 목사들을 선임했다. 이 일도 조신구 회장이 각 지역에 있는 한인교회를 직접 찾아가거나 연락해 사업의 뜻을 알리고 목사들의 동참을 호소해 얻어낸 결과다.
 
런던한인회는 영국의 코리아타운이 있는 킹스톤에서 8.15 광복절 전후로 해마다 한인 축제를 열었는데 프로그램에 참전용사들의 열병식이 있었다. 80세가 넘은 노병들이 8월 더운 날씨에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은 힘이 들어 보였지만 참전용사들은 이 행사를 무척 좋아했다. 마치 영원한 군인으로 살듯한 모습이었지만 이 열병식도 없어진 지 오래다. 참전용사들은 자신이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이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한국 정부에서 그들을 초청하고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이런 발전이 여러분의 희생 덕분이라고 하는 말을 듣기 좋아한다. 더욱이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본 참전용사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자신의 한국전 참전이 한국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믿기 때문에 젊은 날의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들을 잊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레딩한인회나 조신구 회장 같은 사람의 봉사와 활동이 사람의 관계는 물론 지역사회와의 관계나 나아가 국가 간의 관계에도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영국에는 레딩한인회나 조신구 회장처럼 참전용사를 잊지 않고 매년 초청해 음식을 대접하고 만남을 갖는 한인들과 한인 단체가 여럿 있다. 스코틀랜드 에버딘 한인회 남정희 회장은 10년 넘게 '참전용사 위로의 날' 행사를 열고 있는데 공식적인 행사는 10년이지만 개인적으로 스코틀랜드 지역에 사는 참전용사들과 교류를 갖고 그들을 초대해 대접한 것이 약 20년 전부터다. 노팅엄 한인교회도 10여 년 전부터 참전용사를 위한 행사를 시작해 계속 이어져 오고 있으며 케임브리지의 한인들과 한인교회에서도 지난해부터 지역 참전용사회와 교류를 갖고 그들을 초청해 잔치를 열고 고마움을 표시한다.
 
영국에서 한인들의 행사에 초대되어 오는 이들 중 영국인은 물론 다른 문화권의 인사들이 단골로 하는 인사말이 한국전쟁에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파병했고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혈맹이란 얘기를 첫 화두로 꺼낸다. 한국에서 온 이들도 공식적인 자리의 첫인사는 그런 고마움의 표현이다. 그러나 정작 살아있는 참전용사에게 직접 고마움을 전하고 참전용사들이 고마움의 보답을 피부로 느끼게 전해주는 이들은 이처럼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좋아서 하든 나만이라도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하든 그들이 하는 일은 분명 누군가가 놓치고 있는 일을 기꺼이 떠안은 것이다.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참전용사들을 해마다 초청해 잔치를 연 이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하던 일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이들도 있는 등 처음 행사가 시작된 연도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몇 년 되지도 않은 것을 기억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언제가 공식적인 행사였다고 규정할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몇이 만나다가 전체 모임으로 발전했을 경우 조금씩 규모가 커지고 해마다 달랐기 때문에 언제부터 공식적인 기록으로 할지를 모르는 식이다.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다는 투다. 레딩한인회 조신구 회장도 2001년 첫 만남이 있었고 2002년부터 행사를 했지만 거른 적도 있어서 20년 역사라고 얘기하기가 부끄럽다고 했다. 해마다 행사를 한 것은 맞지만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에 실린 사진도 지역 신문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와 취재한 것이다. 취재는 물론 참전용사들이 '참 고마운 한국인들이 있는데 소개 좀 해달라'고 신문사에 요청했던 것이다.
 
참전용사들과 만남을 마련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어려움이 있다. 영국의 전국적 규모 참전용사회가 없어지면서 관리가 되지 않아 행사를 하려 해도 초청 대상인 참전용사들의 명단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초청장을 보낼 대상을 찾는 것이 아는 참전용사를 통해서 다른 이의 주소를 묻곤 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또 하나, 지인들의 도움으로 음식을 장만하고 장소를 빌리고 공연을 준비하지만, 그 도움을 언제까지나 장담할 수 없어 해마다 행사를 앞두고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라 기관이나 업체에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다. 도움을 청하려고 생각했다가 간혹 참전용사를 핑계로 사적 이익을 챙긴다는 오해를 살까 두려워 매번 그만둔다고 한다. 조신구 회장도 '음식 장만은 한인들이 모여서 즐겁게 하는데 참전용사를 위한 작은 공연이라도 기관에서 지원해 줬으면 한/"고 했다.
 
템스 강변에 선 참전용사의 기념비는 물론 의미가 깊다. 기념비의 건립은 참전용사들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기념비의 산증인인 참전용사들이 기념비만큼의 대우조차 못 받는다면 그것이 우리가 걱정하던 바로 그 '잊혀진 전쟁, 잊혀진 인물'이 되는 게 아닐까. 참전용사의 곁에서 그들을 잊지 않는 한인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 달래야 할까. 누군가가 놓친 부분을 아름답게 채우는 이들, 영국의 한인사회는 이런 민간 외교의 일선에 선 이들이 많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글 : 한인헤럴드  지원 : 한국 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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