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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윗슬쟈켓 | 죠지 스텁스

hherald 2010.07.17 18:31 조회 수 : 3134

 

언제나 미완성인 ‘한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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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갤러리’의 생뚱맞은 걸작 “윗슬쟈켓(1762)”. 실물 크기로 묘사된 장대한 크기(292 cm × 246.4 cm)의 초상화,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윗슬쟈켓이라는 잘빠진 말이다. 안장과 고삐를 벗어 던진 아라비아산 종마의 위용은 힘과 아름다움을 넘치도록 보여주며 관람객들의 시선까지 솟구쳐 오르게 할 만큼 위력적이다. 죠지 스텁스(1724~1806)는 ‘말의 화가’로 유명한 영국화가다. 동물의 해부학과 생리학을 공부한 그는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 문명의 힘보다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고 자연을 탐구하기로 작심하였다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 작심을 평생 지킨 그는 말을 비롯한 개, 사자, 기린 등의 동물들을 자연이라는 배경 속에서 포착하기를 즐겼다. 시쳇말로 ‘한 우물’을 판 사람이다. 그런 일관된 집념에서 우러 나온 그의 그림은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물론 당시 영국에서는 스텁스보다 먼저 말을 그리는 화가군 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것은 승마가 당시 귀족들의 가장 중요한 취미였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텁스의 외길인생의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의 사회풍토는 사회를 형성하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에서 비롯된다. 개개인이 한 우물을 파니 사회도 한 우물을 파는 것이다. 50년째 방영되는 TV 드라마 ‘코로네이션스트릿(Coronation Street)’이나 58년째 공연되고 있는 아가사크리스티의 ‘쥐덫(The Mousetrap)’같은 연극은 그 지루한 한 우물파기의 화석처럼 존재한다. 얼핏 보기에는 한없이 지루해 보이지만, 영국 TV야말로 세계 TV 역사상 가장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보유한 걸작 공중파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양한 다큐가 있고, 촌스러운 드라마가 있고, 문화와 예술의 역사가 있고, 젊음의 신물결이 있고, 낯뜨거운 엿보기가 있고, 세계의 음식이 있고, 다양한 웃음이 있고, 무엇보다도 전통이 살아 있다. 전유성이라는 천재 희극인이 ‘개그(開口)’라는 용어를 만든 이후 모든 코메디 프로그램이 개그에 단조롭게 종속되어버린 우리 TV의 안타까움은 전통의 상실이라는 비극의 전조로 보인다. 서영춘이나 심형래 같은 한 시대를 웃겼던 대가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영국 TV에 아직도 ‘베니힐쇼(Benny Hill Show)’나 ‘미스터 빈(Mr. Bean)’이 등장하는 걸 보며 한없이 부러운 것은, 전통에 대한 확인이란 미래를 향한 보폭의 준비동작이라는 미련 때문이다. 외침에 의해 수많은 전통을 몰수당했던 우리 사회로서는 눈물 흘리며 처절하게 지켜 내야 할 것이 전통이라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보물상자 아닐런지.

 

또 한가지 스텁스의 그림을 보며 떠올려 보는 것은 영국이라는 나라의 막강한 ‘매니어 문화’다. 매니어 문화란 국민들 삶의 만족도와 직결되는 일종의 사회 공통의 신념이다. 국민들 취미의 다양화를 이루어낸 취미문화의 최고 선진국이 영국이다. 취미가 확실해야 이 험난한 물신화 시대에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보여주는 나라가 영국이다. 취미가 없다면 평생 돈만 따라다녀야 하지만 확고한 아름다움을 공급받는 취미가 있다면, 어느 정도 돈을 벌어 인생을 즐기고 싶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고 다채로운 취미를 지니고 있다. 어떤 분야에서건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최강의 지식을 지닌 인물이 아마츄어다. 따라서 전문가들이 함부로 거짓을 말할 수 없다. 락(Rock) 음악을 밥 다음으로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가장 잘 정리된 영국 락백과사전이 마틴스트롱이라는 아마츄어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빨리 늙을 것 같아서 일을 한다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 일만큼 분주하게 탐구할 취미가 없기 때문 아닐까. 취미생활에서 인생의 진짜 아름다움을 공급받는 영국인들이 대견해 보인다.

 

이 위대한 말초상화는 스텁스의 패트런이었던 챨스왓슨 후작(영국 수상을 지낸 인물)의 주문으로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죠지 3세’의 기마초상을 그리려는 계획하에 당대 최고의 말 전문 화가였던 스텁스가 말을 그리고 다른 화가가 인물상과 배경을 그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완성된 스텁스의 말은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완벽한 것이었다. 후작부인도 감동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정치적 이유에서라는 설도 유력하지만, 너무도 완벽한 스텁스의 ‘윗슬쟈켓’은 계획을 수정시키고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살아남았다. 그런 연유로 이 그림이 미완성이라는 여러가지 추측들이 제기되는 것이다. 마지막 세션의 일화는 전설로 남아 있다. 다루기 힘들기로 소문났던 아라비아 종마 윗슬쟈켓이 거의 완성된 그림을 보고 실제의 말로 혼동하여 날뛰며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스텁스는 마굿간의 소년과 함께 가까스로 광분한 윗슬쟈켓을 진정시켜 그림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은 이 그림과 친분이 있어 보인다. 그 친분의 속내는 단순히 성공을 쟁취하라는 권장이라기 보다는 미완성인 인생을 통찰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때 보다 아름답지 않을까 싶다. 인생의 성공은 화려함 따위가 감히 잡을 수 없는, 파도 파도 끝이 안 보이는 우물 같은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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